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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Sep 05. 2017

물질 바로보기

공기나 생각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물질과 마찬가지로 실체적 관념의 대상이 된다. 인식 가능한 것들은 모두 실체적 관념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문젯거리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대상들이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만질 수도 있는 그런 물리적 대상들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있다'라고 하고 '존재'한다고 여긴다. 인식이라는 것이 실체적 존재감과 함께 붙어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인식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저것 예외를 따질 것도 없이, 인식되는 것은 모두 가짜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매우 단순하다.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이 공부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식되는 것들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인식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이원적 관점이 허구임을 아는 것이 바로 깨어남이다.


실체적 관념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원적 사고 구조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용어다. 이는 우리의 이원적 사고 시스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불교에서는 이원적 생각 관념에 빠져서 눈 앞의 모든 것들이 실제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쫒아가는 사는 사람을 중생이라고 한다. 흔히 경계에 빠지지 말라는 말은 그것을 쫒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쫒을 때는 쫒더라도 그것의 실상, 즉 허깨비 임을 알고 쫒으라는 말이다. 흔히 한로 축괴(漢露逐塊) 사자 교인(獅子咬人)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공을 던지면 개는 공을 쫒아가지만 사자는 공을 던진 사람에게 달려든다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공을 쫒아도 그것이 실체적인 공이 아니라는 것만 알면 공을 쫒던 사람을 쫒던 이미 중생의 삶을 벗어난 것이다. 반면에 공을 던진 사람을 쫒는 사자라 하더라도 그것을 실 체시 한다면 그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흔히 수행을 하다가 귀신을 본다거나, 석가모니 부처님을 친견하고 끄달렸다고 하면 여전히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같다.


이원성은 분별이라는 말이다. 이것과 저것으로 나뉘는 분별이다. 이러한 분별은 단 하나의 실체적 관념으로 구체화된다. 즉, 모든 것이 꿈이고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내 몸 하나는 실재한다고 착각하면 이미 이원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존재하는 나와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몸뿐만 아니라 눈 앞의 티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티끌과 티끌 아닌 것으로 분리가 일어난다.


이원적인 관점으로는, '사과'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과가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우선 살펴봐야 할 것은 '있다'라는 관념이다. '있다'라는 관념은 '없다'라는 관념과 함께 쌍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없다'라는 것도 '있다'라는 관념 위에서만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둘을 축약하면 '있다'라는 것 하나로 요약된다. 다시 예를 들면, 사과가 있다고 할 때도 '사과'의 존재는 미리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고, 역으로 사과가 없다고 할 때도 '사과'의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있은 후에만 그 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체적 존재 관념이란, 엄밀히 말하면, 무엇이 있다 혹은 없다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어, 즉 '사과'의 존재감 자체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우리가 느끼는 사과의 존재감이 현상적인 사과의 실체와 일치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사과의 실체를 거머쥘 수 있다면 우리의 사과에 대한 실체적 존재 관념은 진실이 된다. 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겠지만 -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사과'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사과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사과가 있다'라는 말도 쓸 수 없고 '사과가 없다'라는 말도 쓸 수 없다. '있다', '없다'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들 이것을 '있다'와 '없다'를 떠난 자리라고 말한다.


주체가 되는 이 사과가 진정 무엇인지 연기법으로 깊게 살펴보면 묘한 일이 벌어진다. 도무지 그것을 정의하고 거머쥘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상황이 온다. 이때 불현듯 찾아오는 각성 중에 하나가 물질에 대한 기존의 관념의 변화다.

사과뿐만 아니라 세상의 물질로 드러난 모든 대상들을 보면 그것들은 그것 아닌 다른 것들이 모여서 드러났다. 문제는 그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뿐만 아니라 노동력, 아이디어, 누군가의 조언, 산소, 기압, 태양열 등등, 비 물리적 요소들 없이는 지금 이 모습으로 드러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단순히 조력자의 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기압 내려가는 순간 사과는 쪼그라 들것이고, 태양이 충분하지 못했다면 이런 맛을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조건 정도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라 물리적 요소 못지않게 평등하게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그 속에서 태양도 볼 수 있고 우주의 모든 것을 그 속에서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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