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에 대한 연기법적 사유
사과의 모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 같다면 일주일 후의 이 사과를 상상해보면 된다. 그래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 것 같으면 1년을 훌쩍 보내 보자. 분명 사과는 썩거나 무르고 벌레 먹은 만신창이가 돼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변함없던 것이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겠는가? 364일을 멀쩡하다가 마지막 날에 갑자기 변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예로 일 년에 1cm밖에 이동하지 못하는 느린 생물이 있다고 치자. 그럼 이 생물은 지금 이 순간 움직이는 것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눈에는 안 보이지만 당연히 움직이고 있다고 보아야 진실에 합당하다.
같은 맥락으로 사과는 지금 이 순간 찰나에 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합당하다. 왜냐하면 천년 후 만년 후 고정적으로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조금 변하거나 많이 변하거나 혹은 조금 안 변하거나 많이 안 변하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진실을 바로보기 위해 이 공부를 한다. 그렇다면 눈에는 감지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유한 진실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여야 한다. 아무리 딱딱하게 굳은 물질이라고 해도, 그래서 천년이 지나도 안 변할 것 같은 것들도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르지 않다. 1년의 세월이 부족한가? 그러면 100년으로 돌려보고 그것도 부족하면 1000년으로 돌려보라. 모든 것이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만 변함없이 확인될 뿐이다. 사과라는 좁은 범위로 억지로 좁혀 놓고 그것이 실재한다고 억지를 부리더라도 <변한다>는 진실은 어이없게도 이렇게 쉽게 확인된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적인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크나큰 살림살이다. 이 살림살이를 제대로 챙겼다면 이러한 진실을 바탕으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찰나에 생멸하고 있음을 수시로 느껴보자.
이제 눈앞의 사과가 매 순간 변한다는 진실은 건졌으니 다음으로는 <변하는 것>의 주인을 찾아보자.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술어에 해당하는 주어가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실체적 존재 관념이다. 실체적 존재 관념이란 개체로써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말한다.
우선 사과 하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소리 내어 말해보자.
"변한다"
이때 나의 의식을 살펴보면 주어가 없이 술어만 말해도 '사과'가 주어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음을 눈치챌 수 있다. <변한다>의 주인이 사과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원적 사고 체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자리다. 여기서 사과가 무엇인지 연기법으로 사유해보자. 연기법을 충분히 사유하여 실체적 관념을 약화시킨 후에 다시 소리 내어 말해보자.
"변한다"
이번에는 무엇이 변하는 것으로 이미지가 그려졌는지, 무엇이 주어로 자리했는지 탐구해 보자.
연기법으로 충분히 사유가 진행되었다면 이제 사과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한다>는 현상만 그대로 남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변하는 모양, 현상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 속에는 태양과 농부와 물과 지구와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차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어느 것 하나를 부여잡고 사과라 할 것이 없으며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어서 급한 김에 '공'이라는 말을 우선 거머쥐지만 '공'도 '공' 아닌 것이다.
이렇게 변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눈앞 모양들의 연기적 본질을 같이 사유해 들어가면 더 이상 <변한다>는 말이 예전의 그런 식의 <변한다>는 의미가 아니게 된다. 기존의 <변한다>는 것은 항상 주어, 즉 실체적 관념이 따라다니는 변함이었다면 이제는 주어가 사라진 <변함>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주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체로 확장된 것뿐이다. 전체가 주어라면 주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자동차가 지나간다고 보지만 이제는 자동차라는 현상이 변한다고 인식한다. 시야가 자동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동차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에 <움직임>이라는 것이 <변한다>라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자동차 자체는 안 변했잖아요?>라고 한다면 두 대를 맞게 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멀쩡하게 서있는 가로등도 매 순간 원인과 조건으로 알맹이 없이 변하고 있고 팔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걷고 있는 사람도 계속 변하고 있으며 내가 팔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지구와 우주는 이미 변해버리고 만다. 이것은 시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실 그대로의 표현이다.
이렇게 변한다는 것과 원인과 조건 그대로 결과라는 사실을 사유하는 것은 종이를 믹서로 갈아서 가루가 된 것도 모자라서 끓는 물에 넣고 팔팔 끓여 녹이는 것과 같으니 실체적 관념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실상의 모습을 만나기 위한 진리의 소중한 문고리와 같다. 이제 연기법 공부의 힘으로 잡아당기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