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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Sep 10. 2017

슈뢰딩거의 고양이

깨어남의 관점에서의 이해

양자역학을 살펴보다 보면 매우 흥미로운 실험 결과와 이론들을 접할 수 있는데 그중에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라는 사고 실험은 매우 유명하다. 원래 이것은 당시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비꼬기 위해서, 고안된 사고 실험이다. 즉,거시 세계를 미시 세계 관점으로 바라보면 얼마나 이상한지 설명하면서 불확정성 원리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를 말하고자 함이였다.


실험은 간단하다. 박스 속에 한 시간에 50% 확률로 방사능이 붕괴하도록 라듐을 세팅한다. 이것을 검출할 수 있는 장비를 두고, 검출될 경우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가스를 내뿜도록 장치를 한다. 여기서 라듐의 붕괴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고 우리가 관찰하기 전에는 오직 확률적으로만 예측 가능하다. 이것이 물리학자들이 거부감을 갖는 미시세계의 불확정성인데 이것을 거시적 대상인 고양이와 연결할 경우, 확률적으로만 존재하는, 즉 50%는 죽고 50%를 살아있는 기괴한 고양이를 탄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미시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사건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적으로만 계산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상태의 가능성만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물리의 확정성을 맹신하는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이러한 과학자들은, 불확정적인 미시적 속성은 다름 아닌 그것을 일으키는 '숨은 변수'를 우리가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무지로 인해서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을 뿐, 만일 그 '숨은 변수'를 찾아낸다면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슈뢰딩거는 이 고양이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통해서 이렇게 항변한다.


봐라, 관찰하기 전에 반은 죽어있고 반은 살아있는 상태로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이것은 사고 실험이기 때문에 실제로 고양이를 가지고 재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외부와 상호작용이 완전하게 차단된 박스라는 것은 만들 수도 없고, 우리의 관찰이 간섭이 되어 실험의 순결성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공부 입장에서, 그리고 실상 입장에서,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있는, 즉 상태가 중첩된 고양이는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연기법을 위주로 공부했다면 더욱 그렇다. 슈뢰딩거는 비웃으며 던진 이야기지만 그것은 사실 현상 세계를 제대로 기술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전에 언급했듯이 시간과 공간의 허구성은 이원적 실체적 관념의 허구성과 함께 무너진다고 했는데, 이런 상태에서 물질적 대상들은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 실체적이지 않은 허상의 상태는 수많은 가능성 자체로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된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바로 이와 같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빈 것이 아니라 비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함이다. 고양이의 중첩된 상태라는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의 상태이며 이것은 하이젠베르크가 전자의 상태를 확률로 이해하려는 시도와 같은 맥락이다.


만일 이러한 가능성의 상태가 없다면 '변화'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돌은 무슨 짓을 해도 돌로 남아있는 것이고 사람은 죽을 수도 태어날 수도 없게 된다. 지금과 같은 현상 세계가 드러날 여지가 없게 된다. 이것이 대상을 실체시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반면에 현상 세계를 지금과 같이 드러내도록 하는 기본적인 성품이 된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의 상태는 고전 물리학자들에게는 인정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기괴한 것이었다. 과학은 객관적 대상이 존재한다라는 가정이 성립한 후에야 비로소 다음 이론을 펼치는 것이 가능한데, 이런 상태에 기대어서는 기존의 과학이란 게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원적 실체적 관념 아래에서 과학적 한계점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 나름대로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최근의 과학적 성과들을 보면 실상과 매우 근접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과학적 지식을 살펴보면 연기법을 공부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과학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도 있고 반면에 연기법을 통해 이해된 것이 과학적인 실험이나 법칙에 의해서 보강되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연기법으로 실상에 다다를 수 있었듯이 과학으로도 석가모니와 마찬가지로 이원성의 착각에서 깨어나 그 실상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양자역학이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천재들에 의해 그 이원적 한계와 공백을 메우며 여기까지 발전했듯이 또 다른 과학 천재에 의해서 과학적 한계점을 뛰어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러나 비이원적 실상을 과학적으로 파악했다고 정작 중요한 깨어남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만일 그것이 연관성이 있다면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먼저 깨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 그렇지 못한 이유는 과학적 방법으로 그러함을 확인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원적 실체적 관념이 자동으로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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