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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Sep 26. 2020

‘없다’가 없으니 ‘있다’도 없다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마시오.
바로 그때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이오?


혜능스님이 자신을 쫒아오는 도명에게 했던 유명한 말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어쨌든 핵심은 혜능의 이 말 한마디에 도명이 깨우침을 얻었다는 것이죠.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말라는 한 마디에 어떻게 깨우침이 일어났을까요? 이 신화 같은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시도를 해봤겠지만 이 말 한마디에 깨어났다는 사람은 아쉽게도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오는 방법은, 자전거를 일단 세우고 왼발을 페달에서 떼어 땅에 딛고 나머지 오른발을 왼발 쪽으로 넘겨서 바로 서고, 그동안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게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잡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제대로 효용이 있기 위해서는 실제로 자전거에서 내려오도록 실행해봐야 합니다. 한 번에 잘 안되면 여러 번 시도해서 자전거에서 내려오는 것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전거에 앉아 생각으로만 헤아릴 뿐 직접 내려오지는 않죠. 제대로 실행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그저 생각일 뿐인 것이고요.


혜능의 말은 자전거에서 내리는 방법을 설명할 뿐입니다. 이 말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있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없다]는 생각도 하지 마시오.
바로 그때 당신은 무엇이오?


같은 의미입니다. 다만 조금 더 직접적인 표현이죠.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개념들을 사용합니다. 익숙해서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 중에 가장 핵심은 [있다]와 [없다]라는 개념입니다. 이 대표적인 개념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간단히 실험을 해보죠.


여기 책상 위에 사과가 하나 놓여있어요.

[그림 1]

머릿속에는 '사과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사과를 누군가가 치워버렸어요.

[그림 2]

다시 머릿속에는 '사과가 없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사과가 없다...라고 말하죠.

이번에는 순서를 바꿔서, 당신이 빈 책상을 먼저 봤다고 상상해보죠. 누군가가 사과를 갖다 놓을지 아직은 모릅니다. 일단 당신 앞에 책상이 있을 뿐입니다.

[그림 3]

이때 당신 머릿속에 '사과가 없다'라는 생각은 떠오를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하세요. 분명 [그림 2]와 같은 그림이지만 이 그림을 바르게 보는 것은 '사과가 없네'는 아닌 것입니다. 사과가 없네...라는 것은 사과가 있었다는 기억(생각)에 의지해서 생긴 개념이니, 절대로 먼저 스스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상황 혹은 그림에서 '무엇이 없다'라는 것은 이전 기억을 토대로 한 해석일 뿐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있다]라는 것도 역시 [없다]에 의존해서 생겨난 개념입니다. [그림 1]을 보면서 '사과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사과가 없음'에 의존해서, 기억 혹은 개념에서 의존해서 생겨난 개념입니다. 생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라서 실제로 저 밖의 무엇을 그대로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보통은 '있다' = '존재한다'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냥 인식되는 것을 개체적 존재로 생각해버리는 게 바로 '있다'가 품고 있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존재라는 말은 또 어떤가요?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음에 의존해 생겨난 개념인 거죠. 그러니 저 밖에 무엇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 역시 생각 속의 개념일 뿐입니다. 이상하죠? 우리는 분명 저 객관적 세상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혹은 '있는' 대상을 인식한다고 믿고 있는데 말이죠.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있다' '없다'라는 말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 믿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고 실제로는 우리 머릿속의 개념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생각 속의 세상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멀쩡히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현상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실제로는 '있다' '없다'라는 개념이 서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존재=인식'의 믿음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인식되는 것을 해석해서 '존재'라는 개념을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개념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빙빙 돌게 됩니다. 탈출구가 없어요. 그러면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사과는 뭐라고 해야 하나요? '있다'라고 해도 진실이 아니고 '없다'라고 하기엔 인식이 되고, 존재한다고 하려니 그 또한 개념일 뿐이라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어떻게 봐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생각은 이원적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개입되면 필연적으로 양분화되죠. 있다와 없다가 갈라집니다. 있는 그대로는 이런 분화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혜능이 말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선'과 '악'의 의미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이원적 분리 관점을 벗어나서 살펴보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있다'라는 생각도 내려놓고, '없다'라는 생각도 내려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생각을 내려놓는 다고 눈 앞에 사과의 모양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여전히 사과를 손으로 잡을 수도 있고, 맛있게 먹을 수도 있습니다. 갈아서 주스로 만들 수도 있죠.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과에 대한 기존이 존재 관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저 밖에 사과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존재 관념(생각)으로 사과를 바라봤다면 지금은 그저 전체 경험으로 그 개별적인 사과가 편입돼버린다고나 할까요. 사과라는 생각과 사과라는 경험이 완전히 다름을 알게 됩니다. 이때는 그 사과를 보는 '나'라는 것도 생각 속의 개념임을 함께 보게 되죠. 어디 나뿐인가요.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Q : 하지만 여전히 제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여러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사과를 쪼개면 어떤 모양일 것이라던지, 사과의 맛과 감촉이라던지 그 사과의 대부분을 저는 알고 있고, 그 지식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생각이 개념이니까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요? 


생각은 생각 기준으로 볼 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어요. 당신의 그 지식 혹은 예상들은 모두 유용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마치 지도를 우리가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맞는 지도가 있을 수 있고 틀린 지도가 있을 수 있죠. 그러나 맞던 틀리던 그 지도가 실제 지형은 아닙니다. 구글 지도로 전 세계를 다 돌아봐도 실제 세계를 돌아다니는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죠. 그런데 지금 온전히 지형을 경험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실제 지형을 걸어 다니면서도 그 지도 정보를 덧씌워 보고 있는 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실제 지형은 지도에 무심합니다. 지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건 맞다 틀리다 역시 임의적인 개념이기도 하


모양은 분명 경험됩니다. 그 경험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 모양이 형성되는 것을 가만히 보면 필연적으로 뭔가 다른 것에 의해서 형성됨을 볼 수 있어요. 혼자 뜬금없이 생겨나는 모양은 없죠. 그러니 그 모양은 다른 모양들로 인해서(의지해서) 모양이 드러나게 됩니다. 존재라고 할 것이 없죠. 모양 자체의 존재성은 그야말로 '생각'이 만들어내는 개념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지금 경험하는 세상은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있다' 거나 '없다'는 개념 없이 완전합니다. 아무런 과함이나 결핍이 없어요. '없다'라는 개념이 없는데 어떻게 결핍이 있을 수 있으며 '있다'라는 개념이 없는데 어떻게 풍요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나요. 있는 그대로 보는 와중에 '생각'이 끼어드는 순간 개념의 세계가 찬란하게 펼쳐지죠. 책상 위에 사과가 놓여다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런 이원적 분리 없이, 즉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대상을 바라보라고 하면 마치 바보처럼 아무 분간을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눈을 뜬다는 것이 그런 무기력한 멍한 상태가 아닌가 하고 궁금해하실 수도 있고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이원적 분리감에서 벗어나 보시라고 해도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그런 상태로 여러분들이 빠질 염려는 없습니다. 평생 생각만 하고 생각으로만 살아왔으니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그 반대쪽을 한번 보시라고 살짝 밀어드리는 겁니다. 


이 모든 말과 이야기들이 개념임을 살짝 돌이키는 게 가장 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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