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은 42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Deep thought'이라는 슈퍼 컴퓨터가 내놓은 답입니다. 750만 년 만에 얻어낸 연산의 결과는 당돌하게도 달랑 숫자 42죠. 지금도 여전히 영어로 구글링을 하면 이런 답이 나옵니다.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 42
이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42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추측을 쏟아냈었죠. 그러나 그런 흥미로운 상상놀이에 찬물을 끼얹듯 작가는 그냥 농담이라고 했습니다.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정도 크기의 숫자면 적당하겠다 싶어서 골랐고 그게 다라고 했습니다. 고정관념을 허물고 뛰어난 상상력을 펼쳤던 더글라스 애덤스의 이야기 중 가장 멋짐이 폭발하는 대목이죠. 마치 조주 스님의 '뜰 앞의 잣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승의 물음에 조주 스님이 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영국의 작가가 불교의 선공부를 했을 거 같진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라는 것의 본질을 작가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의미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생각이 만들어내죠. 생각의 내용은 실재가 아닙니다. 직접적 경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생각 자체만 직접적 경험의 대상입니다. 내용인 숫자 42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모든 것에 대한 답이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숫자로서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거죠. 아무런 의미 없이 작가가 골랐기 때문에,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붙이더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뜰 앞의 잣나무가 가리키는 내용, 즉 뜰 앞에 자라고 있는 잣나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 역시 개념이니까요. 의미에 끌려갔다면 이미 속은 겁니다.
실상을 보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의미, 생각, 개념의 허구성을 넘어서고 포함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돌을 던지면 강아지처럼 돌을 쫒을 것이 아니라 돌을 던지는 사람을 쫒아야 하듯 말입니다. 언어와 문자를 던지면 의미를 쫒을 것이 아니라 언어(소리)와 문자(모양) 자체가 일어난 곳을 쫒아야 합니다. 이야기에 빠지는 순간 의미의 세계, 생각의 개념에 매몰되는 것이죠. 의미를 통해선 실상에 다가갈 수 없으니까요. 유니콘의 의미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약간의 유희와 더 큰 괴로움뿐이죠.
이야기는 개별적 의미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집니다. 지금 당신의 이야기 역시 크던 작던 의미와 개념의 조합입니다. '나는 지금 스마트폰으로 브런치의 글을 읽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생각이고 개념의 세계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나'라는 자신이 '지금'이라는 순간에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브런치'에서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실제 당신의 경험이 아니죠. 왜냐하면 본래 '나'와 '스마트폰' 그리고 '읽음'은 본래 분리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일한 하나의 경험을 쪼개어 기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읽음'이라고 해야 합니다. 읽음 자체에는 의미가 없어요. 읽는 주체, 즉 의미의 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미는 언제나 의미의 주체가 있어서 성립합니다. '누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누구' 없이 의미란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스마트폰' 역시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생각하는' 그런 건 모두 유니콘과 같은 개념입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 모든 것은 개념들입니다. 그 개념을 바탕으로 개념의 삶이 살아야 하니 필요한 겁니다. 마치 PC게임 시절에 텍스트로 게임을 이어가던 MUD(Multi-User-Dungeon) 게임과 비슷합니다.
'괴물이 지금 당신에게 다가와 공격합니다.'
'데이비드가 단검 공격을 시작합니다.'
'생명력이 줄어듭니다.'
괴물이 공격해서 캐릭터의 에너지가 달면 그에 따라서 애가 타고, 아이템을 획득하면 좋아합니다. 뭔가 난리법석이 벌어지지만 정작 왔다 갔다 하는 건 텍스트뿐이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머릿속에서만 일정 규칙의 개념만을 주고받으면서 온갖 드라마를 만들어냈던 거죠. 그러니 부모들의 눈에는 그저 이상하게만 보일 뿐이죠.
"그러나 우리의 세상에는 텍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양이 있잖아요. 실제로 대상들과 진짜 모양들이 존재합니다."
모양을 경험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양 자체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분리와 의미가 붙어있지 않아요. 만일 생각을 벗어나 본래의 모양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면 그 차이에 매우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 놀음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죠. 정말 MUD 게임처럼 개념이 붙은 단어들을 주고받으며 심각한 드라마를 만들었음을 보게 됩니다. 뜰 앞의 잣나무나 숫자 42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둘 다 생각 속의 개념으로만 존재합니다.
더글라스 애덤스가 42에 어떤 의미를 담았던지 아니면 자신의 말처럼 그냥 골랐던지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42는 그냥 사십이 [사-십-이]죠. 더 이상 의미를 억지로 찾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건 애초에 없었으니까요. 사-십-이가 일어나는 그 자리만 유일한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