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라는 말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혹은 누구에게 귀속돼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죠. 차를 가지고 있고 집을 가지고 있고 전화기를 가지고 있고 자전거를 가지고 있고 자전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주고 무언가를 사는 행위가 소유의 권리를 인정받는 행위가 됩니다. 또 한 누구로부터 법적으로 물려받거나 건네받아도 나의 소유가 허락됩니다. 소유는 개인 간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소유라는 개념이 허구임을 직시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좀 더 실상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살펴보면 '나의 핸드폰'이란 건 존재하지 않죠. 그냥 핸드폰만 존재한다. (알고 보면 핸드폰이라는 것도 개념이지만... 다음 기회에 다루겠습니다.) 나의 집이란 것도 있을 리 없고 나의 자전거라는 것도 있을 리가 없어요. 그냥 핸드폰이고 집이고 자전거인 거죠. 거기에 누구에게 속한다는 개념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합니다.
내 몸, 내 마음, 내 자식, 내 나라. 누군가는 이런 '내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도 하죠. 이것은 소꿉놀이와 같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한다고 치고' 한바탕 이야기를 펼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거창하게 증빙 서류들을 만들어서 약속의 책임을 무겁게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게 없습니다. 소유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소유라는 개념이 허구임을 알면 진주 목걸이가 끊어지듯 구슬이 바닥으로 쏟아집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끊어져버리죠. 이야기가 끊어지면 드러나는 것은 실상입니다.
내 몸이고 내 마음인 줄 알았는데, 그냥 몸이고 마음입니다. 내가 걷는 줄 알았는데 그냥 '걸음'이고요. 내가 보는 줄 알았는데 그냥 '봄'인 거죠. 모든 행위와 대상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 그냥 행위 자체고 그것 자체입니다. 누구의 무엇이란 소유는 개념이에요. 깊게 보면 소유의 주체랄 것이 없고 대상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는 구조상 언제나 주어가 따라붙는 탓에 우리의 인식이 그렇게 굳어져버린 거죠.
이런 관점에서, 법정스님 말로 유명해진 무소유란 말은 사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라기 보다는, 소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이해해야 정확합니다. 만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라고 이해하면 그 자체가 '소유'할 수는 있지만 소유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에요. 진정한 믿음에는 믿음이 필요 없고 진정한 무소유에는 무소유가 필요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물질적 청빈함이 무소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물질적으로 청빈하게 살아야 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생각에 걸려든 것입니다. 물질적 소유가 가능하다고 착각에 빠진 것이기 때문이에요. 꿈속에서 부자로 살던 가난뱅이로 살던 그저 꿈인 줄 알면 그것이 진정한 무소유입니다. 소유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함을 보는 것이 무소유의 전정한 의미입니다.
지금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정말 당신 것이 맞을까요? 길 가는 아무에게나 물어도, 구차한 설명과 문서와 증인을 들이 대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진짜 당신의 소유가 맞을까요?
소유의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는데 이렇게 멀쩡히 인식하고 있는 '나'는 무엇일까? 그것이 이원적 생각으로 흐르면 '몸'과 동일시되는 한 인간 즉, '나'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생각으로 흐르지 않으면 비로소 실상을 보게 된다. - 파주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