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지구는 돈다'
천동설에 지배되었던 인류가 이 말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이 지동설은 과연 사실일까? 혹시 우리가 천동설을 믿었 듯, 지동설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기준'이라는 아주 중요한 말에 대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기준이 세워져야만 무엇이 무엇 주위를 돈다라는 말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돈다는 말은 태양을 '기준'으로 세웠을 때에만 성립한다. 태양이 기준이 아니라 목성이 기준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인정한 기준인 태양은 사실 기준으로써 아무런 당위성이 없다. 단지 지구보다 크다거나, 단지 그 중심으로 소행성들이 몇 개 돌고 있다거나, 혹은 빛을 발한다는 이유가 '중심'의 이유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지구는 움직이고 태양 역시 움직인다. 은하계 역시 움직이니 굳이 정해야 한다면 천지동설 쯤으로 해야 무난해지지 않을까.
알고 보면 이 세상에는 중심이라고 할 것이 없다. 어떠한 대상에도 중심이 없다. 그 무엇이 되었든 중심을 찾아보면 그 중심은 임의적이면 작위적이고 매우 임시적이다. 당위성이 없다. 그래서 평등하다. 이해가 어렵다면 꿈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 꿈속에서 어디를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지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꿈속에서 사과가 하나 등장했다고 하자. 그 사과의 중심은 어디일까? 없다. 꿈 자체의 중심은 어디일까? 없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이 공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힌두 사상에서 현상 세계를 마야라고 지칭하는 것 역시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세상의 본질이 그러한데 유독 우리 자신에게는 아주 강력한 중심성이 있다. 바로 '나'라는 생각이다. '나'를 중심으로 경험이 일어나고 '나'를 중심으로 존재성이 생겨난다. '생각'은 나의 중심성뿐만 아니라 대상의 중심성까지도 만들어낸다. 그런데 정작 생각 자체는 중심이 없다. 중심이 없는 놈이 마치 모든 것에 중심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낸다. 마치 그림자가 진짜 나무를 만들어낸 것과 같다. 생각은 무언가 실체적인 것을 만들 낼 능력이 애초에 없다. 그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림자의 모양을 통해서 진짜 나무가 만들어졌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세상의 중심은 어디일까?
나의 중심은 어디일까?
여기서 중심을 '실체' 혹은 '존재'라는 말로 바꿔도 의미는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