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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Nov 15. 2020

희망, 이제 버려야 할 때

희망을 위한 희망


희망 (希望)


1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2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



희망은 우리가 소장하는 몇몇 긍정의 개념 중에서도 '사랑' 다음으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개념인 듯하다. 희망을 갖고 미래를 꿈꾸며 살아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상황적으로 보면 '희망'이라는 것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도 이해는 간다. 언뜻 보면 삶에는 답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삶에 답을 제시해야만 할 때, 그때 희망의 대표 주자로 종교가 등장하고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 등장한다. 모두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런데 이 희망이란 것의 맹점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이라는 데 있다. 미래 지향적이란 말 역시 매우 긍정적으로 쓰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인간의 미래란 결국 인간 모두에게 동일한 죽음으로 귀결되므로 깊이 들어갈수록 되돌아 나오거나 또 다른 의미를 발명해 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후세', 즉 우리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으로 보면 '인류'의 미래나 '후세'의 미래는 결국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념으로 만든 의미일 뿐 ‘나’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 연관이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소유의 개념과 같은 착각이다. 그에 비해 지금 당신의 행복은 실체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면 마치 매우 비관적인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긍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희망은  희망을 버릴  찾아진다. 미래의 무엇을 위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 서있는 그곳이 바로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 허구적인, 이 희망이라는 개념을 확인하지 않고는 그야말로 희망 고문 이상을 넘어서는 진정한 희망을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를 떠난 그 무엇도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어남에 대한 공부도 마찬가지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그 결과로써 언젠가 깨닫게 되리라는 '희망'은 하늘을 가리는 먹구름과 같다. 진정으로 봐야 할 것을 못 보게 가린다.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못 보게 만든다. 지금 당신의 유일한 희망인 생생한 경험을 못 보게 만든다.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자유와 행복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조차 예외를 두지 않는 전체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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