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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Jul 11. 2021

연속성이 만들어내는 환상

이전 글 '이어지다'에서 무언가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존재관념에 대해서 살펴봤다. 눈을 뜨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바로 우리의 기억과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대상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이다. 그 연속성으로 인해 존재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 모델 A > 


위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이것은 그냥 흰색과 검은색이다. 당신의 머릿속의 비슷한 무엇이 연상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물체도 아니고 그냥 흰색과 검은색이다. 흰색은 검은색으로 인해 드러나고 검은색은 흰색으로 드러나는 상호의존적 연기적 드러남이다. 여기에는 존재성이 없다. 물론 지금은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이원적 분리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대상 자체에 존재관념이 많이 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그림에서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 모델 B > 


난데없이 흰 부분이 살아 움직이는 듯 펄떡된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임으로 인해, 즉 변화로 인해 흰 부분의 존재성이 확 살아났다. 흰색의 펄떡임을 만들어내는 요인 혹은 존재가 있는 듯 한 착각이 일어난다. 그런데 <모델 A>를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그런 게 발견되지 않는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연속성이다. 그 연속적 변화로 인해서 생겨나는 존재관념이다. 


A에서 흰 부분은 그저 검은 부분으로 인해 연기적으로 드러날 뿐 흰 부분 자체의 뭔가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이 저런 변화를 만들어 낼까? 그 변화의 연속성을 만들어서 이렇게 펄떡이는 착각을 만드는 것일까? 변화의 주체는 무엇인가? 


저것을 단순히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동일한 구조를 설명하는 단순화된 모델이다. 이 모델은 당신 앞에 수도 없이 널려있다. 이것은 우리의 심장에 비유한다고해도 해결해야 할 의문과 이해의 구조는 동일하다. 순간을 표현한 모델 A가 있고 그 연속성인 모델 B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심장이 뛰고 있다고 말하지만 뛰는 심장이란 것이 따로 있지 않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A에서 B로 넘어가면서 등장하게 된 연속성과 그로 인한 존재관념에 관심을 가져보자. 


이전 것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다음의 변화된 버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즉, 변화라는 것은 이전 것의 부정을 딛고 일어나는 것이라 실제로는 존재성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전 것의 부정이라고 해서 그 이전 것은 존재했는가 하면 그것 역시 존재성이 유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그 존재를 유지하면서 변화한다는 것은 마치 다이아몬드를 찰흙처럼 주물럭거리며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많이 변하거나 혹은 아주 적게 변한다거나 하는 변화의 정도는 상관이 없다. 임시적이긴 하지만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이전의 모양을 대부분 계승하는 것 아니냐. 갑자기 아무것도 없다가 그 비슷한 모양이 번쩍하고 생겨나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모양으로써 이어진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은가? 


꿈속에서 사과가 계속 등장한다고 해서 방금 전의 사과와 지금의 사과가 같은 모양으로써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가? 다시 강조하자면, 같은 모양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어진다고 할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화면에서 1분 동안 보이는 사과가 비슷한 모양이라고 해서 앞의 장면의 사과와 뒷 장면의 사과가 계속 같은 사과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생각으로 그렇게 보는 것이다. 


순간이라고 하는 것도 개념이지만, 순간이 모여서 우리의 현상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볼 때, 현상세계가 진실하다면 그 모임인 순간들도 진실해야만 한다. 영화처럼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고 해보자.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멈췄다. 생각도 물론 멈췄다. 이것을 이 세계의 표본이라고 볼 때, 각자의 구분되는 모양들이 어떻게 유지되고 드러나 있는지 살펴보라. 여기에 무엇이 존재한다...라고 할 것이 있을까? 모든 것이 연하여 일어나는 연기, 그것이 극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표본을 놓고 봤을 때 이러하다면 그 표본의 모임인 지금 우리의 세상은 어디에서 진실함을 찾을 수 있을까? 심지어 우리가 살펴봤던 그 표본은 지금 이 순간 있지도 않다. 


<모델 A>를 보면 연기의 의미가 제대로 보인다. 시간에 지배받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시간이란 것은 개념이라서 시간이 개입되면 이해가 잘못돼버린다. 이 모든 것이 팔만대장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 직접 확인되고 있다. 


어제가 어디 있느냐? 가져와 봐라. 스님들의 단골 질문이다. 어제를 가져오라 하니 누구에게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요구처럼 느껴지겠지만 누구에게는 그것이 허구성의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실체적으로 생생한 세상이 누구에게는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이라고는 없는 신기한 허구의 드러남인 것이다. 그 둘은 정확히 같은 세상을 본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 이면에 존재성이라는 신기루를 만들어내는 연속성에 대한 착각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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