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친절하게 설명하기
당신이 만들어낸 모든 경계는 '당신 자신'을 분리된 존재, 즉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누는 이 최초의 근원적 경계에 기초해 있다....
'근원적 경계'라고 표현한 것은 실제로 다른 것 보다 더 근원적인 경계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나'라는 개념에 강하게 밀착돼 있는 우리의 보편적인 상태를 기준으로 표현했을 때의 '근원적 경계'라는 말이다. 실제로는 눈앞의 컵과 그 옆의 접시를 보고 분리로 느끼는 것과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리로 보는 것은 정확히 동일하다. 색안경을 쓰면 모두 붉게 보이는 것이지 좀 더 근원적인 붉음이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다른 모든 경계가 이 첫 번째 경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경계를 간파하는 것은 모든 경계를 간파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경계가 이 첫 번째 경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나'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들이 잘못 해석됨을 표현한 것이다. '나'라는 경계의 착각은 너무 강력해서 여기서 벗어나면 다른 모든 경계들이 힘을 잃는 결과를 낳기도 하므로 강조되는 것이다.
뭉뚱그리자면, 최초의 근원적 경계란 '경험자'와 '경험된 세계' 사이의 간극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는 최초의 경계를 파괴하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다. '최초의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중략)
최초의 경계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결론을 알려준다. 조금 김이 빠질 수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켄 윌버의 주장일 뿐이다. 여기는 누구의 말을 믿고 안 믿고의 영역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게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상관없이 누구의 가르침을 믿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일 뿐이고 믿음이란 상처 위에 붙이는 반창고 같은 것이다.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창고 아래에 상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든 믿음을 걷어내야 하는 마당에 또 다른 누구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정반대의 길로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의심'이다. 정말 최초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지 의심을 한가득 품고 살펴보는 일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진정 최초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합일의식을 가로막고 있는 실질적인 장애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최초의 경계를 찾아내서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이거나 적어도 어마어마한 시간낭비다...
여기서 합일의식이라는 말은 개인적인 자아와 전체성이 사라진 의식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사실 '합일의식'이란 말을 들으면 뭔가 합일의 상태가 되어야 할 것만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의식 자체에 이미 분리가 없기 때문에 합일의식이라는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스스로의 착각만 걷어내면 본래부터 합일이고 말고 할 게 없음을 알게 된다. 합일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최초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먼저 최초의 근원적 경계 그 자체를 찾아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만일 그 경계가 정말로 환상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그 흔적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최초의 경계를 찾아보자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경험과 느낌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된 나, 즉 '분리된 채로 경험하고 느끼는 나'를 아주 잘 찾아보자는 뜻이다. 나는 아무리 잘 찾아보아도 이런 '나'를 결코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내가 없다'란 말을 사용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분리된 나'라는 존재감이 실은 오해이고 잘못 해석된 감각이라는 것, 우리의 관심사는 바로 이 잘못된 해석을 일소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경험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나', 주변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된 '나'라는 존재감을 내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 '나'라는 느낌과 외부세계에 대한 느낌을 다르게 여긴다. 그러나 '나'라는 느낌과 '저 밖에 있는 세계'의 느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두 감각이 실제로는 '하나이자 동일한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밖에 있는 객관적 세계라고 느끼는 그것과 내면의 주관적 나라고 느끼는 그것이 동일하다는 말이다. '경험하는 자'와 '경험된 세계' 사이에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따로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몸-마음'구조를 주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습관을 벗어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기존의 믿음이 너무 그럴듯해서 그것을 반박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이야기는 전혀 그럴듯하지도 않고 허점 투성이의 설정들이다. 매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것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우리가 꿈속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이유는 실제로 그것이 당연하거나 당연하지 않아서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는 경계를 믿는 데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내 말이 아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자신은 소리를 '듣는 자'이고, 감각을 '느끼는 자'이며, 광경을 '보는 자'라는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진 사물을 보고 있는' 보는 자라거나, '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듣는 자로 묘사해야 한다는 점이 뭔가 이상하진 않은가? 지각이란 것이 정말로 그렇게 복잡한 것일까? 지각 과정에는 이처럼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진 대상'이라는 세 가지 개별적인 실체가 진정 포함되는 것일까?.....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진 대상은 모두 한 과정의 세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든, 다른 둘 없이 하나만 존재하는 일은 걸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머지가 없으면 그중 어떤 것도 발견될 수 없다.
여기서는 우리의 인식과 경험 측면에서 파악되는 경계를 살펴본다. 이 내용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는가? 아마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과 마음이라는 '나'가 여전히 저 밖의 세상을 목격하고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기 위한 프레임, 즉 인식의 구조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이 유지된 상태에서는 저 말들이 이상하고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다. 부분적으로 '보는 자'와 '보는 대상' 간의 경계가 없음을 보더라도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이 그대로 살아있는 한은 다시 예전의 착각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단일한 작용인 '본다'는 경험에 대하여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진 대상'이라는 세 개의 단어를 갖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단일한 물의 흐름을 '흘러가는 물이 흘러가는 행위를 하면서 흐른다'라고 표하는 꼴과 같다. 이는 전적으로 동어반복에 불과하며, 실은 하나밖에 없는 곳에 세 개의 요인을 도입하는 셈이다..... 과연 경험자가 정말로 경험된 대상과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지를 살펴보자. 먼저 듣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눈을 감고 실질적인 듣기 과정에 주의를 기울여보라. 새들의 노랫소리, 자동차 소음, 귀뚜라미 우는 소리.... 그 모든 소리에 아무리 신중히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당신이 결코 들을 수 없는 한 가지 소리가 있다. 당신은 '듣는 자'를 들을 수 없다..... 듣는 자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듣는 자가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우리가 '듣는 자'라고 부르게끔 배워온 그것은 실제로 다만 듣는 경험의 한 측면 일 뿐이다. 현실에는 오직 소리의 흐름만이 존재하며, 그 흐름은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거기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두개골 안쪽에 있는 '드는 자'라는 감각이 듣는 경험 그 자체 속으로 녹아들도록 놓아두면, 당신은 자기 자신이 '외부 소리'의 세계 속으로 온통 녹아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험과 동떨어져 있는 나 자신을 찾으려 할 때마다, 그것이 마치 경험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듯 보인다. '경험하는 자'를 찾으려 해도 우리는 늘 또 다른 경험만을 발견하게 되며, 주체와 객체는 언제나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만이 폭로된다..... 자, 이제 '나'와 '나의 경험'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으니, '나'와 '내가 경험한 세계' 사이에도 아무 간격이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기 시작하지 않는가? '나'는 곧 '나의 경험'이고, 또한 '내가 경험한 세계'이기도 하다. 내가 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새를 보는 경험 그것이다. 내가 책상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책상을 만지는 경험 그것이다.
켄 윌버의 책 <무경계> 중에서...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프레임은, '나'라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리적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구조다. 의미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프레임이다. 프레임이 없이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암호는 해독을 위한 수단(프레임)이 없이는 그저 무의미한 문자의 조합일 뿐이지만 암호를 만들 때 씌웠던 프레임을 다시 갖고 오는 순간 의미는 드러난다. 프레임이 바뀌면 이야기가 바뀐다. 이와 동일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이 바뀌면 세상의 이야기가 바뀐다. 우리가 하는 일은 현재의 프레임을 다른 프레임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프레임 자체를 걷어내는 과정이다.
하나의 현상 혹은 대상에 적용할 수 있는 프레임의 수는 무한대다. 따라서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언제나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한다면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나'라는 '몸-마음'이 태어나서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세상을 살아가다가 수명을 다하면 병들고 죽는다.
이 메인프레임 안에서 켄 윌버의 글들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어려워진다. 컵을 보는 '나'가 있고 컵이란 게 있고 보는 행위 간에 경계가 존재한다. 컵을 보는 '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메임프레임 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치부된다. 마치 꿈속에서 꿈속의 황당한 내용들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문장을 이해하는 관점이 다른 상황에서 생기는 근본적인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런 글들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데로 메임프레임 자체를 리셋해야 한다. 그랬을 때만 초점이 들어맞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프레임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영화의 스크린을 예로 설명해보자. 영화 속에선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간에 화면이 커트되고 다른 장면이 전환돼도, 주인공의 대화 중에 카메라의 앵글이 바뀌어도 우리는 자동으로 '주인공'이라는 존재성을 붙들고 이어가며 약 두 시간 남짓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 화면이 바뀌어도 주인공의 모습을 계속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모양에 존재성을 부여하고 계속 이어진다고 여기면서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것 역시 메인프레임의 영역 안에서 해석되는 방식인데 우리가 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러면 이 프레임을 걷어낸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거기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없다. 각각의 다른 장면들이 계속 깜빡이며 나타나고 사라질 뿐이다. 방금 전의 주인공과 다음 순간의 주인공이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같은 게 아니다. 앞의 주인공이 뒷 장면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뿐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찰나의 화면만을 놓고 볼 때,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그 순간 만이라도 존재하는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그림'일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이다. 각각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모양'은 스스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아닌 것들(배경)에 의해서 드러난다. 여기에는 개념이란 것이 없어서 이야기가 없다. 메임 프레임을 걷어낸 상태다. 메임프레임이 걷어지면 비로소 개념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세상을 찰나의 순간만 놓고 볼 때 영화 속의 한 장면(찰나)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찰나의 순간을 놓고 볼 때 존재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찰나의 순간이 모인 지금 이 세상에서 존재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금의 메인프레임이 실제로 그러하다면 우리의 찰나의 순간에서도 그 존재성이 드러나야만 한다. 꿈속의 찰나의 순간과 전체 꿈은 다르지 않다. 아무리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진다고 해도 꿈을 꾸는 어느 순간에도 존재성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실은 존재라는 것 자체도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다. '존재'라는 것이 개념인데, 그 개념적 '존재'를 찰나에서 찾던 꿈속에서 찾던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겠는가.
토끼 구름이 흘러간다. 어느 순간 토끼의 모양이 강아지의 모양으로 바뀌고 그리고 흩어진다. 머릿속에 토끼라는 개념이 남아있을 땐 토끼가 변했다고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
내가 사과를 본다. '나'가 있어서 그리고 '사과'가 있어서 그것을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경험은 절대 그렇게 일러주지 않는다. '내가 사과를 본다'는 것은 마치 사과의 맛을 글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첫맛은 쌉쌀하고 중간 맛은 달콤하며 끝 맛은 시큼하다. 이런 표현은 진짜 사과의 맛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사과를 본다'를 개념으로 인식하지 말고 직접 그 경험의 맛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막상 뛰어들면 알겠지만 거기에는 '나'도 없고 '사과'도 없고 '봄'도 없다. 그냥 이렇게 그 '사과의 맛'으로 뛰어들면 켄 윌버가 말하는 무경계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된다.
혹시라도 뭔가 모호하고 확실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개념의 맛, 그동안 확실한 맛에 중독돼 있는 탓이다. 이름이 있어야 하고 정의가 내려져야 하고 정리가 되어야만 하는, 그 인위적이고 가상적인 맛에 중독된 탓이다. 우리는 다른 글 들에서 이미 확인했다. 모든 이름과 개념은 실제의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임시적인 모양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뿐이라는 것을. 지금 실제의 경험에서 느끼는 그 모호함이야 말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일한 확실함이다. 거기에는 확실하다 모호하다는 개념도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문제의 메인 프레임을 벗어나면 우리는 모든 일상에서 경이로움을 만나게 된다. 비단 남극의 오로라만 경이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자체가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한 평생 오로라만 보고 살다가 지금 지구의 일상을 생전 처음으로 경험한다고 생각해보라. 이유도 없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과 피어나는 꽃, 물체와 물체 사이의 공간, 멀리서 들리는 소음들, 문득 피부를 스치는 바람, 따스한 햇살, 사람들의 다툼, 경박스러운 욕지거리... 심지어는 지나가는 개가 수북이 쌓아 놓은 똥 무더기까지, 그에게 경이롭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