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생각 인식
분별하지 말라
분별은 생각뿐만 아니라 인식하는 모듯 것이 분별이지만 이런 말을 할 때는 그저 '생각으로 분별하지 말라' 정도로 이해해면 좋겠다.
분별은 현상세계가 드러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인식의 조건을 위해 드러나는 현상적 차별을 첫 번째 분별이라 하고 그 위에 얹는 또 하나의 분별, 즉 생각을 두 번째 분별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분별이란 우리가 없애거나 싸워야 할 대상은 아니다. 세상에 그래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생각'이 마치 없애야 할 대상처럼 인식된 것은 그 '생각'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에 너무 치중되어 본질을 보는데 어려움을 격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각은 모두 틀리다. 정확히는 당신의 생각의 내용은 본질과 다르다. 이때 본질을 못 보게 하는 주범이 바로 분별이다. 정확히는 분별의 내용이다. 이렇게 말하면 '본질'이라는 뭔가 거창한 느낌을 갖게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간단하다. 사과의 맛에 대한 설명과 사과의 맛 자체가 바로 생각과 본질의 간극으로 보면 된다.
이걸 어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 차이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과의 맛에 대한 경험을 아무리 많이 설명을 한다고 해도 결코 사과의 맛에 닿지는 못한다.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색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그러니 당신이 매일 마주하는 경험을 아무리 정리하고 생각하고 기억해도 실제 당신의 경험의 맛과는 다른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떠올려 보라. 나는 지금 휴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거실에 나가기 전에 침대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들기면서 간단히 글을 쓰고 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이야기는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경험과는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그 경험을 글로 표현하고 누군가와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이런 느낌 저런 느낌 이런 감정 등등으로 늘어놓는 것이 최선일뿐. 나는 이것을 경험의 맛이라고 표현한다.
이 맛에는 시간과 공간도 없고 어떤 개념도 붙어 있지 않다. 매우 본질 적이며 직접적이고 자연적이다. 자연적이라는 말은 이미 누구나 그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누구나 그 맛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생각도 마찬가지로 이 맛이 있다. 생각도 경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건 생각의 내용에 떨어져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맛을 느낄 수 있을 땐 전혀 다른 세상이 당신 앞에 펼쳐진다. 당신이 매일 마주하는 같은 사람들이 같은 사람들이 아니고 매일매일 지루하게 느껴졌던 일상들이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유일 무이한 무엇이 된다.
'나'라는 것도 이 맛이 있다. '나' 또한 경험의 내용이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분별' 역시 경험의 내용이니 마찬가지로 '분별' 자체의 맛이 있다. 누군가 분별하지 말라고 할 때는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 하기보다 생각의 맛에 관심을 옮겨 보면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