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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Feb 12. 2023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비이원을 위한 이원의 활용

비이원의 실상은 당연히 말로 할 수 없다. 사과의 맛을 말로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말의 도움 없이 눈 뜨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인간이 언어와 개념에 매몰되지 않았다면 깨어남이 인생의 주제로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언어의 도움으로 생각을 벗어나고 포함하는 실상을 마주하게 된다.


문제는 말이 아닌 것을 말로 안내할 때 생기는 오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자꾸 손가락을 보게 되는 문제다. 사람들이 자꾸 손가락만 본다고 손가락질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차피 우리가 가진 것이 손가락 밖에 없으니 그 손가락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달을 볼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분명 달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친절하진 않다. 본질을 바로 알려주기 위해 이렇게 일러주지만 요즘 시대에 과연 이런 말을 듣고 눈 뜨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잣나무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는 왜 잣나무가 깨달음일까 하는 생각의 질주를 시작한다. 이성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의 프로세스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항상 나와 세상의 본질을 확인하는데 장애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 또한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단지 우리는 '생각'과 '개념'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탓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병에 걸렸을 뿐이다. 생각은 아무 죄가 없다.


고요함에 집착하고 생각을 기피한다면 우리의 이성 영역은 퇴보하게 된다. 선공부와 심법 공부의 풍토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수행의 성과로 인식하거나 세상사에 얼마나 관심을 갖지 않는 지를 공부의 척도로 여기는 듯하다. 조금이라도 생각을 굴릴라 치면 어김없이 분별하지 말라, 망상하지 말라며 호통이 내려진다. 이런 방법은 본질을 확인하는 그 지점까지는 매우 효과적이고 유용한 방편이지만 이는 일시적이어야만 한다.


인류의 진화가 이성영역의 발달로 진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깨어남이 인류의 삶에 있어서 대전환을 이루는 의식의 발전이라면 우리의 이원적 의식은 비이원적 실상의 토대 위에서 더욱 활발하게 꽃을 피워야 당연하다. 깨어남은 진정한 자신과 세상의 본질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둔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분명 '뜰 앞의 잣나무'라는 대상에 몰입되어 본질을 못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본질에 몰입되어 뜰 앞의 잣나무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건 공부의 바른 길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고 가리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손이 있다면 열심히 가리켜야 하고 입이 있다면 열심히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일려 주어야 한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 그리고 과학의 발달은 분명 많은 현대인들의 눈을 뜨게 하는데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문자조차 남기지 못했던 지난 2천 년 전과 비교하면 비교 조차 할 수 없이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말로 표현하는 이유다.


뜰 앞의 잣나무는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며 뜰 앞의 잣나무를 떠올린 바로 그 공간이고 잠시 후 잊히고 다른 것들로 채워질 당신의 앎이며 본질이다. 뜰 앞의 잣나무라고 낮게 읊조리는 울림이 요동치는 공간이고 그 울림을 인식하는 앎이며 그 울림 자체다. 어렵지 않다. 사과의 맛을 알기 위해선 그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그 맛을 음미하면 그만이다. 그 맛을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당신은 사과의 맛을 음미하고 있다. 지금 당신에게 일어나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저 그 경험의 맛이 바로 '뜰 앞의 잣나무'의 맛이고 당신 자신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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