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균열의 시작
'사과'라는 단어가 실제 사과가 아니란 것은 모두 안다. 언어로써 사과는 실제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사과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 어리둥절해한다. 우리가 진짜 사과라고 믿는 것의 본질은 사실 경험뿐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사과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을 통해서 또한 사과가 '있다'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사과가 있다'라는 서술은 평범한 문장이지만 지극히 인위적인 문장이기도 하다. 마치 오묘한 오로라의 신비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급하게 그려놓은 조잡한 그림과도 같다. 오로라 그림이 오로라를 표현한 것은 알지만 실제 오로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마치 아름다운 설악산을 직접 경험하는 것과 '아름다운 설악산'이라고 쓰인 푯말을 보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사과가 있다는 서술은 순전히 생각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우리의 경험은 그저 사람들이 사과라고 부르는 그것의 여러 인식의 출몰뿐이다. 사과라는 것이 존재하고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런 경험이 일어나고 그 경험을 모아서 '있다'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사과'가 있으니까 당신이 인식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경험이 일어날 수 있나요?
이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한 번 잘 살펴보자. 세상에 '있다'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사람이 있을까? 없다. 경험 이후에 '있다'라는 개념이 만들어 냈을 뿐이다 (만일 이 말이 이해가 안 간다면 시간을 갖고 잘 생각해 보길...) 그래서 이 세상 그 누구도 '있다'라는 개념 이후에 사과를 경험하지 않는다. 단지 당신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결국 사과의 다양한 측면의 경험만 인식될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과의 여려 측면을 경험하고 '사과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길을 지나가는 멋진 남성을 붙들고, 내가 너를 자주 봤으니 너는 내 신랑이야...라고 하는 것만큼 경험과 생각은 연관 관계가 없다. 남성을 본 것은 직접적인 인식이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은 별개다.
내 눈앞에서 사과라는 것의 여러 감각에 인식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직접적 인식과 '존재'라는 개념은 아무런 연결성이 없으며 단지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다.
혼란스럽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은 숨겨있지 않고 훤히 드러난 실상이다. 당신은 이미 그 실상을 매 순간 목격하고 있지만 스스로의 개념에 갇혀 보지 못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그 무엇도 '존재'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는 우리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