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대충하는 생각이란 의미입니다. 정확하지 않고 대략적이란 말입니다. 왜 대충인가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그뿐이라서 그렇습니다. 세상의 역동성을 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래도 소통은 해야 하니 뭐라도 그런 게 필요하긴 합니다.
편의상 개념은 그냥 '생각'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됩니다. 모든 언어적 생각은 '개념'의 다발로 구성됩니다. (여기서는 생각이나 언어를 통틀어 그냥 '개념'이라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나의 소중한 생각이 그저 대충 그런 것으로 치부되니 좀 그런가요? 그런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지구에는 튼튼한 줄기와 가지 그리고 입사귀를 가진 수많은 식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일일이 따로 가리킬 수 없어서 공통적인 ‘듯’ 보이는 특성을 모아 이런 것을 ‘나무’라고 부르자고 약속합니다. 나무와 나무가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대략적으로 그렇게 생긴 것을 '나무'라고 부르기로 약속합니다. 나무라는 개념의 탄생입니다. 한 단어로 우주에 있는 모든 '그런 비슷한 것들'을 몽땅 가리킬 수 있으니 이 '개념'이란 게 얼마나 편리하고 신통방통한 발명인지 아주 놀랍죠. 성경에서는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비슷한 것들을 모아 하나로 이름 짓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추상화 과정입니다. 이런 추상화 과정을 통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마치 있는 것처럼 대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일들이 가능해지는 거죠. 오늘날 우리의 사회의 모든 것은 이런 추상화에 기인합니다. 종이 쪼가리에 화폐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저장하고 유통하기도 하고 실제로 화폐의 이동 없이 숫자만 바꾸는 것으로 돈이 이동했다고 믿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아파트는 소유라는 개념 없이 존재하지만 등기라는 제도의 개념화를 통해서 마치 실제로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죠.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족들을 제치고 번성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합니다.
개념은 실제로 그것을 가리키는 부호와 같은 것이지 실제 그것이 아니죠.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사과와 사과 그림의 차이처럼 완전히 다르죠. 머릿속에 떠올린 돌멩이의 이미지와 눈앞의 돌멩이처럼 근본적으로 다른 겁니다. 그래서 개념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화살표일 뿐 실제 그 대상은 결코 아니라는 거! 정말 중요합니다.
이런 걸 누가 모를까 싶지만 개념의 제대로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은 그리 쉬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믿고 계속 끌려다니는 것은 이 개념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오랜 시간 개념을 쓰다 보니 개념을 실체시하는 부작용이 생겨버린 거죠.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 줄 착각한다는 게 설마 그럴까 싶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3차원 공간인 지구에 태어나 살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살다가 늙어서 죽는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관이 이와 같다면 이것이 바로 개념을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모두 개념으로 이루어진 허구라서 그렇습니다. '나'라는 개념, '인간'이라는 개념, '3차원 공간'이라는 개념, '지구'라는 개념, '결혼'이라는 개념, '자식'이라는 개념, '산다'는 개념, '죽는다'는 개념, 온통 개념입니다.
그럼 개념 아닌 게 있나요? 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대목입니다. 무엇이 개념이고 무엇이 개념이 아닌지를 살펴보는 게 바로 공부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개념의 허구를 꿰뚫어 볼 수 있겠죠. 그전까지는 개념의 세상에서 꿈을 꾸며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낮에 꾸는 꿈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전도몽상’이라고 하죠. 바로 고통의 씨앗입니다. 그래서 개념은 현상적인 관점에서는 효율적이고 편리하지만 결국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개념은 고정이지만 개념의 대상은 임시적이기 때문입니다. 개념은 변하지 않지만 실제 대상은 순간순간 변하고 사라집니다. 잡을 수가 없어요. 잡을 수 없는 걸 잡으니 고통이 되는 겁니다. 결혼 전엔 그렇게 스윗하던 남편이 변한 거 같아서 괴롭죠. 젋을 땐 그렇게 이쁘던 아내가 늙어서 쭈글쭈글하니 괴롭죠. 갑작스럽게 친구가 죽으니 괴롭습니다.
개념은 잡을 수 없는 걸 임시적으로 잡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죠. 뭐라도 잡아야 사람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무한을 두려워하고 피합니다. 그게 자기 자신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자, 이제 상황을 좀 뒤집어 볼까요?
지금까지 쭉~~ 이 글을 잘 따라오셨다면 죄송하지만 그것이 바로 개념 속 꿈을 꾸신 겁니다. 글은 개념의 집합이니까요. 마치 하루종일 생각에 끄달려 다닌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죠.
개념은 언제나 맥락 안에서만 생명력과 효용성을 갖습니다. 조건이 필요하다는 의미죠. 그래서 한글을 모르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었다면 이런 느낌일 겁니다. 물론 애초에 읽지도 않았겠지만요.^^
한 글자씩 쭉 눈으로 따라 읽어보세요.
แนวคิดมีชีวิตอยู่เสมอในบริบทเท่านั้นที่จะมีประสิทธิภาพและมีความสำคัญ นั่นหมายความว่าต้องมีเงื่อนไข ถ้าชาวไทยที่ไม่รู้จักภาษาเกาหลีอ่านบทความนี้ อาจจะรู้สึกประหลาดใจได้เหมือนชาวไทยที่ไม่รู้จักอังกฤษที่อ่านบทความนี้
검은 건 글씨요 흰 건 여백이라.... 우리가 모르는 문자라서 당연히 아무 의미도 개념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에 빠지지 않고 글자의 모양을 인식했을 겁니다. 이때가 개념에 빠지지 않은 상태예요. 글자의 모양은 인식하지만 내용은 모르는 피상적인 상태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글을 읽는 건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고요? 정보의 측면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죠. 다만 이것은 개념의 속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위한 예일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접하는 그림과 소리들을 이런 글자에 대입해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개념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개념과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죠. 보는 것은 같지만 누군가는 개념의 세상을 보는 것이고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있냐고요? 네, 있죠.
정말 중요한 건 한글이건 태국어이건 아는 그림이건 모르는 그림이건, 알면 아는 데로 모르면 모르는 데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그 앎이 항상 함께 했다는 점입니다. 생각과 개념의 허구성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결국 그 개념을 이해한다고 알고 모른다고 아는 그 앎이 항상 함께 했다는 점을 얘기를 하고자 함입니다. 생각과 개념에 관심을 뺏겨서 정작 봐야 할 것을 못 보니까요. 그게 바로 사람들이 애타게 찾던 그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