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을 마치 어릴 때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언제나 평화로울 것만 같고 고통이나 슬픔도 없고 갈등이란 것도 없을 것 같고, 지금 보다도 훨씬 바람직한 상태로 보이니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만일 깨어남이 이렇게 갓난 아기의 순수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치매에 걸린 분들이나 머리를 다쳐서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분들이 깨달음에 가까운 상태라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미 죽음을 맞이한 분들이야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들이라고 봐야 하고요. 꿈도 없는 깊은 잠은 좀 더 깨달음에 가까운 상태라는 말이 됩니다. 순수함으로 치자면 제가 키우는 닭, 살구도 꽤나 순수한데 그러면 우리 살구는 이미 깨달음의 상태인걸까요?
이런 생각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현재를 벗어나야 할 잘못된 상태라고 전제한다는 데 있습니다. 깨어남의 영역에서는 맞거나 틀리다는 이분법이 유효하지 않음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바로 아실 겁니다. 진리가 부분적이거나 특정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체성이라는 점은 나침반과 같은 길잡이니까요.
반대로 얘기하면 어릴 때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깨어남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현실이 내 앞에 놓여있던 현재 또한 깨어남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요. 애초에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너무 당연하죠. 단지 문제는 현재를 부정하고 다른 반쪽을 택할 때 발생합니다. 어쨌든 지금 역시 깨어남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말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입니다. 생각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정신 없이 끌려다니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가 자주 들을 수 밖에 없었던방편인거죠. 그런데 이 때문에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공부라고 생각해서 문제입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성의 영역이 퇴보되고 논리적인 생각도 제대로 못하게 된다면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공부를 할수록 생각이 잘 나지 않고 멍해지는 건 공부가 깊어져서 그런 게 아니라 또 다른 반쪽이 되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깨어남은 의식에 진화와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이 말은 깨어남이라는 것이 과거의 순수한 의식으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이원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이후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깨어남은 이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품고 그 상위 단계로 진행됩니다.
이성의 영역에 출현은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이성으로 이성을 뛰어넘어 깨어남에 접근해야하는 이유입니다. 말이라는 가리킴 없이 깨우친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 없이 깨우친 사람도 없고요. 단, 이원적 생각에 말려들어서는 안 되고, 그 허구적 속성을 잘 파악하고 활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듣고 일어나 듯 이성 영역의 발달로 인해 이원성의 세계에 빠진 인간은 결국 그 이성이란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합니다.
선(禪) 공부 중심의 한국 풍토에서 '연기법' 공부가 의미가 남다른 이유입니다.
깨어남은 언제나 삶을 위한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