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는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특히 그 죽음이 육체적 한계로 인해 자발적으로 선택된 것 일 수록 흡입력을 갖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게 인간인데... 나라면 그렇게 못 할 거 같은데... 이런 생각들이 이야기를 더욱 대단하게 만듭니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바치는 건 그야말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하죠.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얇은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작가는 어느 날 폐암에 걸린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안락사를 위해 스위스로 떠나는 여정에 조력자로 함께 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물론 그 여정에서 지인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안락사를 택한 약 79% 정도의 사람들이 다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분은 원래의 계획대로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의연하고 단호하게 자신의 손으로 죽음의 밸브를 열어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안락사라는 생소한 여정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이후 작가에게 일어난 심경의 변화가 잘 담긴 책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선 채로 책을 거의 다 읽긴 했지만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죽는 당사자 보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조력자의 심리 변화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삶에 대한 통찰도 있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솔직하게 담겨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결론을 읽고는 아쉽지만 책을 그대로 내려놓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삶에 대한 통찰도 있을 수 없죠. 어찌 보면 죽음이라는 이벤트는 삶을 돌아보고 통찰을 멈추지 않게 하는 원자로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다른 얘기가 펼쳐졌을 겁니다.
죽음 직전 저자는 지인에게 어디로 가게 될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지인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어디든 갔으면 좋겠고 그곳이 천국 같이 좋은 곳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저자는 종교에 귀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답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과거 지인이 안락사 결정을 내렸을 때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안락사를 죄라고 생각하죠. 삶이 신에 의해 주어졌듯이 그것을 거두는 권리 또한 신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란은 결론이 나지를 않죠.
죽음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믿음입니다.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이죠. 종교는 저마다의 나름의 죽음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죽음의 이론을 택하고 믿는 것이 죽음의 의문을 해결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이고요. 대표적으로 천국을 가거나 윤회를 합니다. 죽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죽고 나서는 또 죽었으니 알 수 없는 게 죽음이라서, 논리적인 사고의 막다른 길처럼 보입니다. 정말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믿음인 거죠. 간극을 본드처럼 이어 붙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간극에는 언제나 '의심'이 붙어있습니다. 아무리 강력한 믿음이라고 해도 언제나 '의심'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에는 '믿음'이 필요 없죠.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알아야 하고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누가' 죽는 지를 알아야겠죠. 누가 삶을 살고 있고 누가 죽음을 고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문제 해결의 자연스러운 귀결 아닌가요? 믿음이 아니라 의심과 탐구가 필요합니다. 죽음에 대한 의심과 탐구가 아니라 그 이전, 누가 죽고 사는지를 먼저 알아야 다음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유니콘이 다리가 두 개인지 세 개인지 논하는 건 일단 유니콘을 발견하고 해야 할 일입니다. 만일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질문들이 되는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