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이 건 꼭 알고 가자
눈앞의 대상들을 바라본다.
모니터가 있고 글씨가 보이고 키보드도 보이고 핸드폰도 보인다. 모두 다른 것들과 구분되고 분별되는 것들이다. 구분되는 것은 색과 모양 그리고 다른 공간적 위치에 따른 명암의 구분 등으로 인해 발생한다. 공간에는 이렇게 복잡하게 대상들이 뿌려져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양을 통해서 이것을 다른 것과 구분한다.
상황을 조금 단순화시켜 보자. 하얀 도화지가 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종이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연필로 점을 하나 찍어보자. 이제 큰 도화지 위에 검은 점이 하나 생겼다. 비로소 흰 종이 위에 검은 점과 흰 배경이 구별된다. 이 구별이 가능한 이유는 <점>과 그 바탕인 도화지의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언가가 눈앞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것과 구분되는 무엇이 필요하다. 만일 도화지가 없다면 점은 드러날 수가 없다. 점은 도화지에 의지해 있고 도화지는 점에 의지해 있다.
도화지는 점에 의지해 있다.
잠깐만!
점이 도화지에 의지해 있다는 말은 이해가가 가지만 '도화지가 점에 의지해 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도화지와 같은 하얀 공간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에게 하얀 도화지만 볼 수 있게 특수한 안경을 만들어 씌워줬다고 상상해 보자.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 아이가 평생 본 것은 흰 도화지뿐이다. 이 아이에게 도화지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화지와 도화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대상이 그 아이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도화지 위에 검은 점이 생겼다. 그 순간 아이는 검은 점과 그것과 구별되는 하얀 도화지를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점>이 생김으로써 <점> 아닌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점과 점 아닌 것은 동시에 드러나게 되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된다. 의존하게 된다는 말은 그것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했을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이런 경우 그것을 개별적인 존재로 볼 수 있을까? 의존해야만 존재하는 것의 존재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옛 현자들이 찾은 결론은 ‘그러한 존재성은 다름 아닌 당신의 생각일 뿐이고 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상대성 혹은 이원성은 세상을 드러나게 하는 기본 구조다. 온갖 복잡하게 보이는 눈앞의 대상들도 알고 보면 그것과 그것 아닌 것과의 구분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고 인식되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이원적 구조안에서 인식이다. 이원적 구조 안에서는 모든 대상들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것처럼 인식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상적이고 개념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식되는 것은 모두 가상적인 것이다.
잠깐만!
이 세상은 몽땅 상대성으로 드러나 있는데, 그럼 온 세상이 모두 가상적이란 말인가? 내가 하는 이 모든 경험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경험되는 것과 실재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우리의 이원적 생각이고 그 생각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 것이 관념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는 경험 즉, 입을 움직이는 느낌 + 입 속의 촉감 + 단 맛 + 반만 남은 사과와 그것을 해석한 <나는 사과를 먹는다>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과를 먹은 경험은 그 경험 그대로일 뿐이다. 반면에 <나는 사과를 먹었다>는 것은 생각으로 지어진 관념적 이야기다. 관념적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죽은 이야기다. 마치 진짜 사람과 밀랍으로 만든 인형과의 관계와도 같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직접적인 <경험>을 <이원적 생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험 자체는 분리가 없다. 그리고 그 자체로는 어떤 존재성도 없다. (볼드에다가 밑줄까지 그었으니 이 의미를 이해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존재성을 부여하고 그 실체감에 스스로 속으니 꿈과 같고 가상적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는 어떤 존재성도 없다.
결국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과 저것을 분리하는 것이 허구임이 드러난다. 이렇게 이원성으로 드러나는 실체적 관념이 착각임을 보는 것이 바로 깨어남이다. 신에게 복을 빌거나 사후의 삶을 위해 굿을 하거나 혹은 보통 사람들이 갖지 못한 신통력을 갖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 모든 것들은 실체적 관념을 강화시키는 것이라 오히려 반대로 가는 길이다.)
이원성으로 드러나는
실체적 관념이 착각임을 보는 것이
바로 깨어남이다.
연기법적 관점에서도 결국 같은 얘기지만 원인과 조건들이라는 복수의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즉 이것은 이것 아닌 것들에 의존해 생겨났으니 이것은 이것 아닌 것들과 다르지 않다. 이것 아닌 것들과 구분할 수가 없다.
인식 가능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드러난 개념적인 것들이다. 전체성으로 하나지만 의식의 장난으로 분리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앞으로 무엇이 건 인식으로 인해 구분 현상이 벌어질 때는 그것이 개념이고 실체적 관념이란 것을 눈치채야 한다. 그래서 각각 개별적으로는 주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꿈속에서 사과가 하나 굴러간다. 나는 사과가 실제로 존재하는 줄로 안다. 그 모양이 너무나 진짜 같고 정교하다. 그런데 꿈속의 어떤 미래적인 기술 덕분에 그 사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알고 봤더니 하늘에서 내려온 형형색색의 로봇 팔 들이 사과를 공간 속에서 하나씩 그려 세상으로 던져지는 것이었다. 너무나 실제 같은 모습의 사과가 공중에 홀로그램처럼 그려져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 나. 눈앞의 여전히 굴러가고 있는 사과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했으므로 그것이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속지 않는다. 그 사과를 이용해 주스도 만들고 샐러드도 만들어 먹지만 결코 그 사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과에 집착하지 않으니 사과가 없어졌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사과에 집착하지 않으니 사과의 맛은 더욱 신비롭고 소중하다. 로봇 팔은 사과가 드러나기 위한 원인과 조건들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