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관점의 크기라고는 했지만 사실 관점에는 크기가 없다. 관점은 말 그대로 점(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위치는 있으나 면적을 갖고 있지 않은 수학적인 개념과 비슷하다. 그래서 큰 관점 작은 관점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관점을 '시야'라는 말로 바꿔서 보면 시야 자체는 넓은 시야 좁은 시야가 없다는 말과 같다. 단지 전체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 뿐이다. 가능하면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 정보를 얻고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한 선택을 내리는데 유리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된다.
실상을 보기 위한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비슷하지만 좀 더 극단적이다. 비슷한 부분은 관점의 위치가 좋아서 시야가 넓을수록 유익하다는 점이고, 다른 점은 관점의 위치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관점의 수에 대한 문제라는 점이다. 수많은 관점을 모아 포괄하면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하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무관점'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무관점'은 관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점의 합이다.
'무관점'이 과연 관점인가 싶겠지만, 이해하기 쉽게 관점의 중첩이라고 생각해 보자. 좀 더 쉽게 말해서 다수의 관점이 포괄되어 단 하나도 버려지지 않는 관점이라고 생각해 보면 된다. 시각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나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초점을 두지 않음으로 해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은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 걸까?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관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모양과 의미와 느낌이 모두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기도 하다. 객관적이고 고정적인 대상이 밖에 있고 우리의 관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그렇게 달리 보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논리적 사유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실상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말하는 고정관념은 '그런 객관적인 것이 저 밖에 고정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말한다.
시냇물을 알기 위해서 소용돌이치는 부분의 방정식만 정리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위에 잔잔한 구간이라던가 폭포처럼 낙하하는 구간에는 적용되지 않는 법칙이다. 과학이 하는 일은 이렇게 분절된 구간의 방정식을 구하는 것과 같아서, 여기에서는 뉴턴이 필요하고 아인슈타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시의 세계로 가면 둘 다 소용이 없어져 버리긴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분절'의 과정이 필요하다. 분절이 있어야 범주가 결정되고 비로소 이해와 서술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분절이란 것은 실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말하는 분절은 단지 임의적일 뿐이다. 분절이 없다는 건 달리는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없는 것과 같다. 결국 무한의 절벽으로 떨어지고 마는... 소름 돋는 비극이 연상되지만 사실은 그 무한의 막막함이 우리의 본질과 닿아 있다. 우리가 아무리 그런 무한을 두려워한다고 해도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과학에서 무한의 값이 도출된 것은 '오류'로 간주된다.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 임의의 정의와 분절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이라도 기댈 것이 필요한 유아적인 시대는 결국 벗어나야 한다. 당신의 무한은 이원적이지만 나의 무한은 비이원이다. 무한의 차이가 아니라 인식의 차이다.
관점 역시 하나의 분절이다. 범주(context)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분절이다. 분절이 없는 원래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는 낯 선 일이 됐다.
시야를 넓히는 것, 분명 세상 사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넓히고 넓히고 넓히다 보면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게 되고 다양한 관점을 포용하는 능력이 생긴다. 물론 실상을 확인하는 데도 역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관점을 넓혀도 '나'라는 관점 하나는 참 해결하기 어려운 주제다. 어렵다고 해서 당위성을 갖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옳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최후의 끝판왕 관점인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당연시하는 이유로 매우 견고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역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원초적인 절대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걸리버는 거인이기도 하고 난쟁이이기도 하다. '나'는 멋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지질한 사람이기도 하다. 100만 원은 큰돈이기도 하고 아주 작은 돈이기도 하다. 티끌은 하찮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 여기서 핵심은 '걸리버'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100만 원'도 아닌 바로 '관점'이다.
하나씩 꿰차고 있는 '관점'을 내려놓는 것은 1초도 걸리지 않는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그런 식으로 당장 실상에 눈을 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점을 내려놓더라도 여전히 생각은 이원적 방식으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을 탐구하면서도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는 이유다. 결과를 확인했어도 의식은 여전히 이원적인 작동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관점을 버린다는 것은 관점을 절대적으로 고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의 관점을 고집하지 않는 것을 통해 다른 관점을 모두 포용하는 기술이다. 이는 이원적인 인식에서 비이원적인 인식으로 넘어가기 위한 기본적인 과정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자신의 현재 상황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이원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자기의 인식의 구조에 대해서 자각이 먼저 필요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우리의 인식 구조가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에 문을 열어두는 것이다. 문을 열어두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이 된다. 그렇게 실상에 대해 눈을 뜨는 여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