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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가 있습니까?

#윤회 #불교 #깨달음 #비이원 #불이

by 나말록 Feb 21. 2025


윤회를 논하는 것은 아직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입니다. 윤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원적 관점을 떠나 윤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 경전을 통해 석가모니가 윤회를 이야기했다고 하는 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정말로 그가 윤회를 얘기했다면 그 시대의 관습적인 표현이었거나 후대에 덧붙여진 말일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하는 분위기 아닌가요? 그리고 석가모니가 윤회를 이야기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이미 경전에 윤회에 대한 언급이 매우 많은 걸로 아는데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죽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죽음 이후의 일을 알 수 있느냐?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분명히 보는 것에 그 위대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그 모든 가정과 전제 그리고 관념을 넘어 눈을 뜨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낸 삶과 세계라는 가정을 뛰어넘습니다. 


죽어보지 않아도 윤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죽음 자체가 개념이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개념인 이유는 죽음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윤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리는지 잘 알지만 사실 황당한 건 이런 사실을 버젓이 두 눈 뜨고 못 보는 게 더 황당한 일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어렵고 대단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원적인 관점에서 비이원의 전환이 일어나면 그동안 내가 '나'와 세상을 잘못 해석해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꿈을 꾸고 있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꿈속의 일을 비로소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꿈속의 모든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죽음이 됐든 윤회가 됐든 혹은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고 나서 보면 윤회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깨어남의 구조상 그런 것은 깨어남과 양립되지 않아요. 내 눈앞의 사과를 보는 것보다 더 명확한 이야기로써, 만일 누군가가 윤회를 이야기한다면 그는 깨달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원적 망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인데 그것은 또 다른 망상을 덧씌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불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불교 안에서도 눈 밝은 분들은 절대 윤회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회가 어떤 측면에서는 필요한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인 기능 차원이지 깨어남의 차원에서는 그런 방편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깊은 무명으로 잘 못 인도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연기법이고 연기법 안에는 윤회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윤회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모두 개념이고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원적인 관점을 떠나, 즉 있다 없다를 떠나 윤회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공부가 말끔하게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튼튼하게 세운 관념들도 많은데 굳이 윤회라는 관념을 하나 짊어지고 갈 이유가 없습니다. 윤회라는 것은 단지 이원적 관점에서 생각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합니다. 


쉬운 예로, 당신의 꿈속에 친구가 등장했다 칩시다. 불행하게도 그 친구는 꿈속에서 차에 치어 죽고 맙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어디로 갔을까요? 그가 윤회한 것인가요? 


그래도 그 많은 불교의 경전과 스승들은 윤회를 얘기합니다. 달라이라마 또한 몇 대를 이어가면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고 또 그것을 철저히 검증하니, 그것이 바로 윤회가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달라이라마든 유명한 고승이든 다들 꿈속의 얘기들 일 뿐이에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저 같은 사람보다는 유명한 스님의 말이 훨씬 설득력 있겠죠. 그러나 제 말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안 받아들이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나저러나 그저 믿음일 뿐이잖아요. 마치 당신이 달라이라마를 보고 윤회를 믿는 것과 같은 믿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윤회가 있다는 것도, 윤회가 없다는 것도 몽땅 남의 말일뿐입니다. 


깨어남을 위한 공부란 남의 지식을 익히거나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단순한 생각이나 추측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그것을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당신의 결론을 기다리지 않고 굳이 윤회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윤회가 공부하는 데 있어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윤회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윤회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좀 허무한 생각이 드는군요. 죽어서 어디로 갈 곳이 없이 소멸된다니 인생이란 정말 허무한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단지 깨닫지 못했을 때의 상상일 뿐입니다. 윤회가 없으니 죽으면 끝이구나. 이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바로 이원적인 생각이고 개념입니다. 윤회할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듯이 죽으면 끝인 무엇 또한 존재하지 않아요. 지금 제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아마 잘 못 이해하고 있으실 거예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러나 제가 지금 윤회가 없다, 죽을 나라는 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당신의 존재를 조이고 있는 그 목줄을 풀어주는 소식인 겁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허무가 아니라 자유와 해방이라는 사실만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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