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은 시끄러운 자리를 벗어나 나가서 전화를 했다. 자리에는 남자 3명이 남아 있었다. 상민은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동호회 회원은 모두 몇 명이나요?"
"총 20명 정도 됩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좀 더 비슷한 부류이지요."
신형규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답했다. 아니, 원래 그런 톤인 것 같다.
"비슷한 부류라면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계시나요?"
이번엔 신종구가 조금 부끄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호회 안의 동호회랄까, 일종의 독서 모임입니다."
"아,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독서가라. 이거 정말 귀한 조합이군요."
상민은 '네모난 원' 같은 형용모순을 접하는 것 같아 놀라웠다.
"사실 책 읽는 취미는 종구 오빠가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냥 우리는 오빠가 사주는 술 마시러 오는 거에요."
이수민이 자리에 돌아와서 덧붙였다.
"제가 원래 사내에서 독서 동아리도 운영해보고 했는데, 현실과 이상이 상당히 다르더라구요."
"어떻게 다르던가요?" 이수민이 물었다.
"현실은 딱 지금과 같은 상황입니다."
딱히 재밌지도 않은 이야기인데 일행들이 박장대소했다. 지리멸렬한 술의 힘이다고 상민은 생각했다.
"다 왔다고? 그래, 내가 앞으로 나갈께."
전화를 받은 이수민이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녀의 사촌인 것 같다.
남자들은 기대하고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이 쓸데없는 뇌의 변연계 작용인가?' 상민은 생각했다.
이수민을 따라 들어온 여자는 다름 아닌 이은영이었다. 상민은 홀로 경악하였다.
'분명히 강릉에 오면 연락을 줄 것 같았는데, 왜 온거지?'
이수민은 엉거주춤 자리에 선 남자들 앞에 이은영을 세우고 그녀를 소개했다.
"우리 서울에서 온 사촌, 이은영입니다."
상민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반대로 은영은 전혀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평범한 이수민과 대조되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의 등장에 상민을 제외한 남자들은 신이 났다.
"서울에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저도 예전에 서울에 살았습니다."
신종구가 이야기한다. 상민도 들었던 아이스 브레이킹 대화법이다.
"아, 네."
뭐 어쩌라고 이야기를 꺼낸건지, 상민은 그가 조금 안쓰럽게 생각했다.
그때 별안간 은영이 상민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또 뵙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아는 사이야?"
이수민이 은영에게 집요하게 캐물을 기세였다. 다른 이들 역시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네, 전에 아버지 일 때문에 식사 한 번 한 적 있어요."
"아, 꼭 드라마 등장 신(scene) 같네." 신형규가 거들었다.
"인생이 연극의 축소판 아닌가요?" 신종구도 동감했다.
마치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의 대화 같은 만담이었다. 물론 차이점이라면 기다리던 고도가 왔다는 것 정도?
이렇게 보니 꼭 말 위의 문사(文士), 혹은 오토바이 위에 독서 동아리가 맞기도 한 것 같다.
"이거 정말 큰 인연이 맞네. 내가 연출하길 잘했어. 우리는 그러면 조연인 것인가?"
이렇게 신형규가 말하자 이수민의 낯빛이 살짝 어둡게 변했다.
아마도 그는 여자에 대해 잘 모르나 보다. 아니면, 노골적으로 새로온 뉴페이스 이은영에게 호감을 보이기 위해 그녀를 소개한 사촌을 장기 말로 사용했다고 상민은 생각했다. 신형규는 40대의 패널티가 있지만 키가 180에 가까울 정도로 큰 편이고 호감형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후자의 측면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수민이 무의식적으로 크게 기분 나쁠 이유는 없다.
신종구가 이 상황에서 눈치 있게 일어나 웃음을 띈 어조로 말했다. 그는 리더 답게 다시 모임의 방향을 정했다.
"자 그럼 새로 멤버가 추가되었으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 볶음밥 추가해야 하는데."
여전히 신형규는 장난을 치고 싶은 모양이다. 이렇게 새로 온 여자에게 쓸데없이 주목을 끌고 싶어하는 그를 보며 이수민은 조소를 날렸다. 상민 역시 뭔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신형규의 의견은 묵살되었고, 새로운 손님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5분 정도 걸어가 있는 현지인 맛집으로 통하는 순대국밥집이다.
"와, 감자탕에 이어 정말 너무하네요." 이수민은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여기가 어때서." 신종구가 웃으면서 불만을 잠재웠다.
"아니, 형님이 지속적으로 아우들 먹여 살리려면 가성비를 추구해야 하는거 아니겠습니까?"
신형규가 쓸데없이 끼어들었다. 신종구는 그보다 높은 연배로 남자의 뻔한 수를 잘 알고 있는 데다가 그저 이 치졸하고 쓸데없는 경쟁의 관전자가 되기로 마음먹어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수육과 막걸리를 주문했다. 술이 먼저 나왔고 크게 한 번 돌았다.
신형규는 궁금한 바를 둘에게 물었다.
"아니, 그럼 은영 씨와 상민 씨는 서로 연락하고 지내고 있나요?"
상민은 대답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아니,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은영은 침묵을 깨고 답했다.
"연락이 끊겼지요. 일 때문에 만난 것이었고, 마무리 되어서."
상민은 은영이 미묘하게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서울에는 언제 돌아가시나요?" 신형규는 취조하듯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휴가 내서 일을 한꺼번에 보려고 와서 다음 주 중에 돌아 갈려구요." 은영이 답했다.
"아, 그러면 아직 시간은 있네요." 신형규는 말을 마치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응, 은영이는 너한테 줄 시간은 없을 것 같아." 이수민이 갑자기 은영을 구하러 나섰다.
"아니, 그냥 휴가를 내서 은영 씨가 여유 있을 거라는 의미지, 왜 혼자 오버하고 그래? 은영 씨는 가만히 계시는데."
신형수는 약간 정색하며 되받아쳤다.
상민은 이 작은 소동을 조금 떨어져 지켜보았다. 빨리 숙소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상민 씨는 결혼하셨나요?"
상민은 신형수가 물어보면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수민이 물었다. 그런데 이은영도 살짝 호기심을 반짝이며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이전 만남에서 결혼 유무에 대해 은영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결혼 했었습니다." 일순간 장내가 고요해진 느낌이었다.
유부남도, 미혼도 아닌 이혼남임을 선포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깨달았다. 상민은 친구가 많지 않은데다 회사에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기에 이런 커밍아웃 경험이 사실상 없었다.
"아, 나도 돌싱이야. 반가워!" 이수민이 손을 내밀면서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은영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
상민은 어쩔 수 없이 하이파이브에 응했다.
민망함과 어색함을 누르기 위해 술이 다시 한 번 돌았다.
"아니,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어?" 이수민이 이어서 물어보았다.
"3년 정도 되었습니다." 상민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애는 없고?" 이번엔 정말 대답하기 싫었지만, 내뱉은 말의 책임감의 차원에서 답했다.
"네, 다행히도."
"다행이라니,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예쁜데. 경험해보지 못해서 아쉽네."
이수민이 상민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아마도 수민에게는 이 회식이 끝나길 기다리는 아이 혹은 아이들이 있는 것 같다.
상민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의 질의응답은 피하기로 했다. 화제 전환을 위해 그는 모임의 주최자에게 물었다.
"혹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보셨나요?"
"네, 유명한 책이니까. 대학 시절에 읽어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요조인데, 화자인 '나'는 요조의 수기를 읽는 구조이지요."
"액자식 구성이네요." 뜻밖에도 은영이 답했다.
"근대소설 도입부에는 꽤 그런 방식이 많았지요. 이를테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도 마찬가지구요." 상민은 아는 체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책 이야기를 꺼내지요?"
"그냥, <인간실격>의 머리말에는 '나'는 요조의 사진 세 장을 우연히 발견한 장면이 있습니다. 오늘 왠지 사진을 들킨 요조가 된 기분이 드네요."
"아니, 멋진 척 혹은 술에 절은 센티멘털리즘?" 이수민이 발언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잠시 화장실 좀." 상민은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을 들렀다 카운터로 계산하러 가는 길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은영의 문자가 와있었다. "나도 곧 마무리하고 나갈테니 먼저 인사하고 떠나요. 30분 뒤에 카페에서 만나요. 장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예상치 못한 만남보다 이 문자가 훨씬 반가웠다. 계산을 마치고 일행들 앞에서 선언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일이 생겼네요. 여기까지 마신 것은 제가 계산했습니다."
신종구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죠. 내가 살랬는데, 괜히 내가 불편하게 만든것 같아 미안합니다. 그래도 헬스장엔 다시 오실거죠?"
상민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민을 딱히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상민은 은영이 알려준 주소를 스마트폰 지도로 확인해 보았다. 식당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이다. 꽤 주도면밀하게 조금 한적한 곳으로 위치를 선정했다.
상민은 취기에 약간 들뜬 기분으로 카페로 걸어갔다. 난생 처음 무언가 잘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운 좋은 감정은 상민에게 낯설었다.
찾아간 곳은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작고 아담한 사장 1명이 운영하는 카페였다. 낮에는 커피를 팔지만 밤에는 술도 파는 곳이었다. 상민은 술을 깨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다. 카페에는 손님 한 명 없었기에 상민은 언제 문을 닫을 지 몰라 사장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상민은 저녁이 있는 강릉의 삶에 이미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데 약속한, 아니 일방적인 지정인 30분이 지나도 은영은 오지 않았다. 상민은 지루해졌고, 무엇보다 이 모든 드라마가 부질없는 장난 같았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과 공허한 이야기들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상민이 자리를 떠나려는데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역시 은영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사촌이랑 같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혼자 갈 수는 없겠네요."
"아, 저는 이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괜찮아요. 오실 필요 없으세요."
"저희 거의 다 왔어요. 잠깐만요." 수화기 너머로 달리느라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상민은 멋쩍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1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카페 문을 벌컥 열고 은영이 나타났다. 10초 후엔 사촌 이수민이 팔짱을 끼고 등장했다.
"아니, 왜 달리는지 모르겠네." 이수민은 은영에게 살짝 핀잔을 주었다.
"왠지 그냥 갈 사람 같고, 상민씨 만난 김에 물어볼 말이 있어서요." 은영은 상민을 보고 대답했다.
"오셨는데, 그러시면 주문이나 하시지요. 자리를 또 옮기기도 뭣하고." 상민은 먼저 온 사람답게 손님을 응대했다.
"여기 술을 파네." 이수민이 계산을 하려는 상민과 은영 사이에 서서 카운터 앞 메뉴를 보며 이야기했다.
수민은 진토닉, 은영은 하이볼을 주문했다. 술안주로는 언제 구입한 지 알 수 없는 눅눅한 마카로니 뻥튀기 과자가 나왔다.
상민은 이들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은영은 아마 수민에게 상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은영은 상민을 만날 생각이 없었기에 강릉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왔을 것이다.
굳이 이런 상황을 연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민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