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는 왜 오신 겁니까?"
상민이 은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상민 씨, 저와 약속이 있지 않았나요?"
"그건 아버님이 날짜를 정해서 보자는 이야기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지금 많이 편찮으세요."
이제 상민은 은영의 아버지인 이중민의 생사나 건강 여부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도 안되게 전개되는 이 우연에 대한 설명도 원치 않았다.
"안타깝네요. 그러면 더 아버지 곁에 계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민은 다소 냉소적으로 의견을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모와 상의하러 왔습니다. 아버지가 강릉에서 요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려구요."
"그러면 이제 은영씨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상민이 물었다. 선을 넘은 질문이라 아차, 싶었다.
"저야 서울에 직장이 있으니 아버님 강릉에 모시고 나면 가끔 들러 봐야지요."
상민의 마음이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은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보니 비어 있었다.
상민도 하이볼을 주문했다. 사장은 마지막 주문임을 알리며 영업시간에 대해 알려주었다.
1시간 안에 이 자리를 마무리해야 한다.
수민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이야기를 대충 듣긴 했는데, 무슨 일을 하시나요?"
"아, 그냥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어디서 뵌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강릉이 좁긴 하지요."
상민은 호구조사 같은 질문이 지겨워 자리에 새로 주문한 하이볼을 단숨에 들이켰다.
먼저 가더라도 이제 예의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았다.
"저한테 물어보시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민은 이런 유형의 질문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해 본 적 없었다.
수민은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전에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의도로 말씀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자존심 상하게 하시네요." 은영은 혼잣말에 가깝게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상민은 의문을 품고 잠시 생각하였다.
'나이가 최소한 띠동갑 이상 차이 날 것 같은데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상민은 돈이 많아 보이는지 자문했다. 그는 지금도 수 년 전에 산 빛바랜 낡은 옷을 입고 다닌다. 비싼 차에 동승한 적도 없다. 남은 것은 외적인 매력인데, 은영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키에 평범한 중년의 얼굴과 희끗희끗해진 머리가 전부이다.
인간과 인간 간의 만남은 균형이 필요하다. 차이 나는 관계는 시작된다 하더라도 유지될 수 없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가 부자가 되면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 둘은 무슨 사이냐고? 그는 그저 '아는 사이'가 된다고 답했다.
"은영 씨가 매력적인 것은 알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때문에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을 것 같네요."
수민은 침묵을 깨고 이 상황을 중재했다.
"상민씨, 오늘 밤도 늦었고 제가 있어서 속마음을 말하기 불편하실 것 같아요. 다음에 시간 정해서 따로 둘이 봐요."
"바래다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상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들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카페를 떠났다.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숙소로 들어가는 상민의 발걸음은 마라 파피야스를 물리친 부처처럼 가벼웠다.
숙소에 도착하여 핸드폰을 보니 은영의 문자가 와 있었다.
"저에 대해 궁금하신 것이 하나도 없나요?"
상민은 생각해보니 그녀가 미혼인지, 아니면 남자친구가 있는지, 회사원인지 혹은 자영업자인지 모른다. 애초에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친구와 같은 기분이 든 적조차 없었다. 나이 차이 나는 여자에 대한 근원적인 기대감이 없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상민은 답장을 보냈다.
"은영 씨는 편찮으신 아버님을 강릉에 모시는 것에 집중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버지는 고모와 같이 살다가 병원에 다니시는 것으로 해서 제가 당장 할 일은 없어요."
"제가 뭐라고 이런 말을 하는 입장이라 우습지만, 사는 곳도 나이도 크게 차이 나는데 이러시는 것은 시간 낭비인 것 같습니다."
상민은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나서 쓴 웃음을 지었다. 40대 이혼남에게 이런 에피소드는 말의 군더더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들기 전까지 상민은 '로맨스 스캠'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은영에게 연락은 없었다. 상민은 거의 매일 다니는 헬스장 관장 신종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날 잘 들어가셨습니까?"
"덕분에 잘 먹고 들어갔습니다."
"아, 센스 있게 중간에 계산도 해주시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자리 만들어 한 잔 해요."
"알겠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아 상민은 단답형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신종구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상민은 그의 눈길을 피했다.
다가오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상민은 송정해변으로 차를 운전해 갔다. 이 곳은 방풍림인 소나무가 빼곡히 세워진 해변이며 인근 안목해변이나 경포해수욕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적이 적은 편이다.
해변가에 펼쳐진 소나무 숲을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개중에는 애완견과 같이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혼자인 사람들이 많았다. 길에는 조각상이 있다. 몇 개의 나체상이 눈에 띈다. 한 남자 나체상은 거꾸로 머리를 박은 채로 있고 반대편에는 여자 나체상이 그것을 응시한다. 남자 나체상의 성기 부위는 관관객들이 자주 만지는 바람에 색깔이 변해있다. 고대의 남근숭배가 현대까지 남아있는 것일까?
상민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모래가 걷는 속도를 기분 나쁘지 않게 제어한다. 중간에 대형 카페가 있다.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직 오픈 전이다. 상민은 커피가 당겼는데 기다리긴 싫다. 숙소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상민은 구속 없는 삶이 주어졌음을 실감했다.
해변을 떠나 숙소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서울 못지 않게 꽤 커다란 규모의 장서를 지닌 도서관이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대여했다. 유명한 책은 원래 잘 읽히지 못하는 법이다. 숙소에 돌아와 상민은 책을 훑어보았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r)>경제성장률(g)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상당한 역사적 자료를 통계 데이터로 가공하여 이 부등식의 근거로 제시한다. 부등식의 간극이 최소화되어야 평등한 사회인데 21세기에 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긴, 연애 혹은 남녀 관계에 있어도 이와 같은 부등식이 존재한다.
외모(얼굴+몸매+키+나이) > 능력(소득+자본)
아무리 후천적 능력인 소득을 올려도 자본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모는 성형수술 등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선천적이다. 특히 나이는 치명적인 요소이다. 부등식의 차이가 크면 연인이 될 확률은 낮아질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리지와 귀족인 다아시가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애정보다는 리지의 아버지가 수입이 괜찮은 젠트리(신사)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랑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다아시는 비록 오만하긴 해도 키가 크고 잘 생긴 사교계의 스타였다는 점이다. 여자는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요소인 외모를 중시한다고 상민은 생각했다.
상민은 친구 손영일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전화를 걸기 직전에 일요일임을 깨달았다. 부담 갖지 않는 내용으로 영일에게 문자를 남겼다.
"잘 지내지? 강릉에 언제 한 번 놀러 와야지?"
문자 APP에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은 한 동안 그가 읽지 않음을 가리켰다. 한참 뒤 영일에게 답장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와이프가 출장이 있어서 다음 주에 시간이 비네. 주중에 한 번 가도 될까?"
영일은 다음 주 목요일에 와서 금요일에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상민은 뭔가 일이 잘 풀려나가는 느낌에 안도했다.
월요일 아침이다. 출퇴근은 특별한 악천후가 아니라면 숙소와 회사가 가까워 상민은 도보를 이용했다. 강릉을 남북으로 가르는 남대천을 따라 걸어간다. 날씨가 벌써 여름을 향해 있었다. 상민은 오디오북으로 책을 읽는다. 고대에 책 읽기의 기본 방식은 음독(音讀)이었다. 따라서 책 읽는 노예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21세기의 축복으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그다지 돈 들이지 않고 독자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특유의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낸 기계 음이 거슬리긴 하지만 인간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나 기계는 그렇지 않다. 다만 오류가 나서 종종 멈출 뿐이다. 아마 잘 숙련된 책 읽기 노예도 30분 간 쉴 새 없이 떠들긴 쉽지 않을 것이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 로비 1층에서 경비가 상민에게 인사를 한다. 상민은 매번 치르는 의식이지만 항상 부담스럽다. 이들과 멋쩍은 인사를 나누다 보니 은영의 아버지인 이중민이 생각났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마지막 직업인 경비를 퇴직하고 지금 강릉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와 조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몰려왔다. 혹시 몰라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으나 그에게 연락이 오진 않았다.
상민은 늘 일찍 출근한다. 업무 준비를 마치면 9시가 되기 전까지 종이로 된 책을 읽는다. 팀장이라 팀원들에게 결재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면 특별히 할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대놓고 하드 커버로 된 책을 펼쳐 놓고 읽으면 조금 눈치가 보인다. 9시가 넘어가면 다시 전자책으로 책을 읽는다.
상민은 점심은 팀원들과 같이 식사하지만 저녁은 특별히 전체 회식이 아니고 같이 하지 않는다. 상민이 입사했을 때만 해도 특별히 일이 없어도 으레 야근을 하였고, 늘 팀장도 껴서 같이 먹었다. 이제는 워라밸을 중시하다 보니 야근도 별로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야근 하는 팀원들만 식사를 한다. 그때 상민은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소외된 느낌이라 씁쓸했다. 그에게 법인카드가 주어졌지만, 정작 쓸 일은 거의 없었다.
팀장이란 직무는 딱히 존중 받지 못한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소작농을 감독하던 마름이나 나치 유대인 수용소의 카포 같은 존재이다. 팀원들과 꽤 나이 차이가 나는 것 또한 팀장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기엔 권위에 있어 적합할 지 모르지만 친밀함을 형성하거나 유지 하는데 장애를 준다. 상민은 리더십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지만 실제로 적용하기 난해함을 느꼈다. 어쩌면 인간관계는 그러한 기술적 노력보다는 연애처럼 타고난 카리스마 같은 본능의 영역에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 정당화라고 불리는 것이라고 상민은 자조적인 진단을 내렸다.
그런데 상민은 한 발 더 나아가 좀 더 먼 과거를 반추해 보니 회사 직원들과 멀어짐은 팀장-팀원 계급 차이가 아니라 노화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역으로 생각해보면 친소 관계에 있어 계급은 나이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갔다. 상민은 회사를 돈벌이 수단이 아닌 친교의 장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노인을 위한 회사는 없다. 게다가 회사는 상시 구조조정을 한다. 정량화되기 쉽지 않은 능력과 달리 인간관계에 작은 흠결이 있으면 유달리 돋보인다. 그로 인해 그는 무능한 사람이 된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혹은 앞으로 못할 것처럼 보이는 직원은 회사 밖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아마도 유기견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상민은 생각했다. 평생 스스로 주인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근하는 1층 로비에서 상민은 전직 경비였던 이중민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