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민은 얇은 등산복을 입고 상민을 응시하고 있었다. 은영의 설명과 달리 겉보기에 멀쩡했다. 상민은 너무나 놀라 잠시 얼어붙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퇴근 하시는 길이지요?"
"아, 제 사무실은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요?"
"팀장님도 짐작하시겠지만, 딸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저와 미리 약속을 하고 보자고 하지 않았나요?"
상민은 상대의 무례함에 약간 짜증을 참아가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딸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 강릉에 도착했는데, 팀장님과 약속이 생각나서 연락 드릴 새도 없이 황급히 왔습니다."
중민의 병색이 얼굴에 잘 관찰되지 않아 상민은 동정심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거짓말 할 이유 또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민의 목소리는 한결 너그러워졌다.
"식사 안 하셨으면 저녁 괜찮으실까요?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은데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려야 하는 음식이 있으신지요?"
"뭐든 괜찮습니다. 단, 술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찾아봐야 하는데, 회사 근처에 자주 가시는 식당이 있으신지요?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상민은 중민의 건강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환자에게는 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시면, 근처에 전복죽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시지요."
상민과 이중민은 회사 건물을 벗어나 식당으로 걸어갔다. 상민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갔다.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이 길어졌다.
상민은 음식을 주문하고 중민에게 말했다.
"실례가 안된다면 어디가 안 좋으신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식전에 이런 말을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배에 통증이 있어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을 가라고 하더군요. 정밀검사 후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췌장암 4기라고 합니다."
상민은 중민이 말한 병의 단계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암은 4기 다음 단계는 없다.
"아직, 한창 때이신데 정말 유감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기쁩니다." 중민은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의 미소는 악의 없이 순수하게 느껴져 상민은 섬찟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기운을 내시고 투병 활동을 하셔야 낫지 않으실까요? 그래도 노년에는 암 전이가 빠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식사가 나왔다. 중민은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중민은 상민의 충고에 답하지 않고 본론으로 이어갔다.
"제가 물의를 일으켰던 실종 사건은 제 나름대로 이별 연습이었습니다. 제가 갑자기 세상에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문득 상민은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빌려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랬군요. 그래도 가족에게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을 텐데요."
"글쎄요. 과연 그랬을까요?"
상민은 그의 반문에 은영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는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 가족의 일이다. 상민은 이방인일 뿐이다. 여기서 쓸데없는 의견을 피력했다간, 법정에 선 무력한 이방인 뫼르소처럼 햇볕 따위의 말도 안되는 진술로 들릴 것이다.
"저는 빚이 많습니다. 아마도 딸은 제가 죽게 되면 바로 상속 포기를 신청할 겁니다. 딸은 제 빚 때문에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청춘의 기회 비용을 잃은 셈이지요."
중민에게는 죄책감이 역력했고, 마치 상민이 로만 칼라를 두른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아마도 제가 죽는 것이 딸에게 위안이 될지도 모릅니다."
상민은 그러나 이중민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 대체 왜 생면 부지에 가까운 자신에게 이런 부담감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민은 화제를 전환해 보기로 한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병원에서는 주요 장기로 전이가 많이 되어 수술을 권하지 않고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개인 보험을 든 것도 아니라 남은 삶이 넉넉하진 않겠네요." 중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맞더군요. 타향 생활을 마무리 해야 함을 직감했습니다. 강릉은 제 고향이었으니 일단은 좋습니다."
'일단은'이란 말이 입 안 가시처럼 와 닿았다.
"원래 제 직업은 교수였습니다. 아마 팀장님 나이에 그만 두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과목을 전공하셨을까요?" 상민은 이제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한 듯 빠르게 질문했다.
"문예창작이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197O년 OO일보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 했습니다."
"아, 작가님이셨군요." 상민은 진심으로 호응했다.
"저도 비록 회사를 다니지만 오랫동안 작가를 꿈꾸는데, 부끄럽게도 실제로 작가와 1:1로 만난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부질없는 개인사(史)지요. 해마다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을텐데 기억에 남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제 자랑을 하려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니고, 저를 설명해야 해서 부득이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집안에 돈이 많아 교수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비 유학생이 되려고 정말 힘들었지요. 대학에 시간 강사로 출강 다니면서 쥐꼬리 같은 월급은 목숨 줄 같았습니다. 조교수로 자리 잡느라 결혼이 좀 늦었지요."
"그런데 왜 정년이 보장되는 학교를 나오셨을까요?" 상민은 중민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호응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중민이 짧게 대답하자 상민은 그가 풍긴 내면의 저항을 느끼고 더 물어보지 않았다.
"어쨌든 저는 대학을 나오고 은영이를 홀로 키우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으로 서점을 개업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중민의 인생 여정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그리고 식사는 마무리되었다. 중민은 상민의 만류에도 분류하고 한사코 밥값을 계산하였다.
"시간 내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글을 쓰신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한 번 저에게 보여주시면 제가 미천한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기십시오." 상민은 중민과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삶의 불꽃이 꺼져 가는 중민에게 만남의 여지를 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가 글쓰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죽어가는 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이 더 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중민의 전직 교수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꺼져 가는 지성의 의연함이 돋보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령은 헴록(독미나리로 만든 사약)을 마시는 소크라테스처럼 우아하게 미화되어 인간미가 덜했다.
오히려 <빅터 니더호퍼의 투기교실>의 장면이 중민에겐 적합해 보였다. 저자는 15년 간 매주 화요일 (25년 간 세계 보드 게임 챔피언을 했던) 톰 위즈웰과 사무실에서 체커 수업을 했다. 15년 째 되는 어느 화요일 톰은 엘리베이터에서 사무실이 몇 층인지 생각나지 않아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수업은 그렇게 끝나고 톰은 요양원에서 생을 마쳤다. 상민은 글쓰기로 중민과 정기적으로 화요일에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렇다면 이중민의 병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아버지가 걸린 신장병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의학으로는 인공 투석도 없었으니 신장염은 서서히 죽어가는 무서운 병이었다. 따라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의 단계를 알 수 없고 막연히 기다릴 뿐이었다. 아마도 은영은 소설 속 1인칭 화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이 되었다. 손영일이 오기로 한 날이다. 상민은 휴가를 내어 강릉역에 친구를 마중 나왔다. 손영일의 모습이 KTX 역사 고객 맞이방에서 나타났다. 결혼식 이후 3년 정도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영일의 눈가와 팔자 주름은 그새 더 짙어져 있었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별 말씀을. 놀러 온건데, 뭘." 주차장으로 이동해 차에 같이 탔다.
"배고프지? 일단 점심이나 먹자." 둘은 예약해둔 식당으로 이동했다. 강릉선교장에서 고택의 종갓집이 운영하는 한정식 식당이다.
"오, 여기 상당히 운치 있네."
"그래. 강릉이 날씨가 좀 좋긴 해." 약간 핀트가 어긋나지만 대체로는 이어지는 말들이었다.
식사는 다음 시간 손님 때문인지 몰라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네가 부럽다. 이제 자유롭잖아." 영일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래, 다 너 덕분인 것 같아." 상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다. 그때 그 일만 아니었어도."
"너의 잘못이 아닌데, 뭘. 전적으로 내 잘못에 우연이 겹친 것 뿐이야."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경포호가 보이는 카페로 이동했다. 상민과 식당보다는 한결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와이프랑 잘 지내지?
"응, 지금 임신 3개월이야."
"와, 정말 축하한다. 드디어 너가 아빠가 되는구나."
"그러게, 옛날이면 할아버지인 나인데, 늙은 아빠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공자 아버지도 70에 공자를 얻었다는데, 늦은 게 아니지."
"그거 알아? 그래서 공자는 3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지."
"건강 관리 잘해야 할 나이지." 상민은 기계적으로 답했다.
"그래, 이제 나도 말 그대로 처자식이 있는 몸이니까."
상민은 앞으로 친구 영일과 이야기 나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친구가 '아버지'가 되고 나면, 그 아이가 아버지를 미워하는 나이가 될 때까지 경조사가 아니고서야 친구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는 없어?" 영일이 상민에게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글쎄, 너도 알다시피 이혼을 겪고 나니 여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벌써 몇 년 지났는데 그대로야? 너도 성욕이란게 존재할 것 아냐."
"글쎄, 그냥 자위 한 번으로 끝날 무가치한 것 같아. 돈과 감정을 낭비할 필요 없잖아. 어렸을 때는 나에게 연애는 위험-보상 배율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그래, 별 것 아닌 안부 인사를 너 같은 이야기로 답하는구나."
40대의 남자 두 명이 이야기를 나눌 대상은 가족, 건강, 여행, 아니면 재테크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상민에게 친구와 나눌 대화 주제는 마땅치 않았다.
"강릉에 사니까 그래도 좋겠다. 날 잡고 가야 하는 여행지인데 주말마다 여행 아니겠어?"
"글쎄, 혼자 하는 여행이 즐겁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상민은 시니컬한 답을 내뱉었다.
"답답한데 좀 걸을까?" 상민은 영일에게 경포호 주변을 걷길 제안했다.
경포호는 4바퀴를 단 가족자전거를 탄 사람들, 그냥 걷는 사람, 달리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4km 남짓 되는 한 바퀴를 돌면 얼추 저녁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너 회사 일은 어때?"
"응, 그냥 비슷하지."
"작품 활동은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영일은 기대하지 않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인데, 글을 쓸만한 소재가 생겼긴 해." 상민은 간만에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인가 보네. 계속 해봐."
상민은 중민과 은영이 얽힌 이야기 실타래를 조금 풀었다.
"그 전직 교수인 경비가 핸드폰을 두고 사라졌을 때 그는 어디에 머물러 있었을까?" 영일이 물었다.
상민은 이중민, 혹은 은영에게 그의 알리바이를 확실히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