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기행-8

by pathemata mathemata

모처럼 상민은 평일의 자신만의 휴일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는 쉬는 날이어도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아마도 마흔이 넘으면 일어나는 신체 현상 중 하나일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미라클 모닝 챌린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제 은영과의 관계가 조금 발전한 것 같으나 그것은 뒤로 하고 주문진으로 혼자 드라이브를 갔다. 이 해안가에는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방파제가 있다. 한류 열풍을 타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념촬영을 찍는다. 드라마 주인공은 사라졌지만 장소는 영원하다. 사람의 기억이 그저 평범한 방파제에 낭만적인 서사를 입힌다.


수평선을 경계로 바다와 하늘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부시게 화창한 날이었다.

상민에게 전화가 왔다. 은영이었다.


"나야. 전화로 반말하니 좀 어색하네."

"아버지는 어떠셔?"

"응, 이제 좀 나아지셔서 내일이면 퇴원하실 예정이야."

"그렇구나. 병원에 있어야겠네. 내가 병문안 가야 할까? 부담스러워 하실 것 같기도 하고."

"응, 장기 입원 하는 것도 아니니 괜찮아."


은영의 통화가 끝나고 방파제를 계속 바라보았다. 햇살이 따가웠다. 혼자서 할 일은 더는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렀다. 연체 중이라 더는 빌려 볼 수 없어 신간 책을 뒤적여 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서재 앞에서 책을 읽고 있는 수민을 보았다.


"어젠 잘 들어갔어요?" 상민이 작게 속삭였다.

"네. 잘 들어갔어요." 수민은 상민 곁으로 바짝 붙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독서 모임 출신이라 그런지 도서관에서 다 뵙네요."

"우연히 만난 기념으로 옆에 북카페에서 잠깐 커피 한 잔 할까요?" 마지막 속삭임이었다.


종합자료실에서 나가는 길에 수민이 책을 대여했다. 상민이 농담 삼아 부탁했다.

"저도 이 책 빌려보고 싶은데, 워낙 게을러서 장기연체 중이네요. 빌려주실 수 있나요?"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이네. 겐자부로 좋아하세요?"

"필력은 비교할 바 아니나 시종일관 주는 불편함을 선호합니다."

"그렇군요. 반납 기일이 2주일 이내니까 저랑 한 번 더 보셔야겠네요. 저는 연체는 딱 질색이라. 그땐 술을 사세요."

"반납하면서 은영 씨랑 같이 술 사드릴께요." 수민의 표정이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카페에는 너른 공간에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오늘 은영이랑 데이트 안하나요?"

"오늘 계속 병원에 있을 것 같아서 따로 약속 잡진 않았습니다. 삼촌은 그래도 안정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수민은 마치 남의 일처럼 냉담하게 반응하여 이상함을 느낀 상민은 화제를 전환하였다.

"신종구님이 겉보기와 달리 독서를 좋아하셔서 사실 놀랐습니다."

"아, 그렇겠지요. 근육이 울퉁불퉁하면 사상은 빈곤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모임 내에서 가장 독서를 많이 하고 자택에 장서도 1만 권은 넘을 거에요."

"아, 가보신 적 있으세요?"

"네. 독서 모임 멤버들이랑 두어 번 놀러 간 적이 있지요. 경제적 어려움이 전혀 없는 분이에요."

"부러운 삶이네요."

"타인이 부러우신가요?" 수민이 곧바로 반론했다.

"네, 부럽거나 질투하지 않은 것이 비인간적인 삶 아닐까요?" 상민은 뭔가 허를 찔린 듯 하여 자기방어를 펼쳤다.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알려드릴까요? 뜸 안 들이고 바로 말할게요. 종구 씨와 이중민, 그러니까 삼촌은 원래 대학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났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서로 잘 아는 사이겠네요."

"네, 맞아요. 작가와 문하생 관계였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결국엔 서로 악연으로 끝났어요. 마치 그들이 쓰려 했던 소설처럼."

"아, 그랬군요. 무슨 사연이었을까요?"

"아무래도 제가 이야기하기엔 너무 무례한 일 같아서요. 그저 치정(痴情) 문제였다는 점만 알려 드릴게요."

"네, 답변으로 충분합니다."

"연체를 하시는 분이라 책 반납하시려면 한참 남았는데, 지금 점심이나 같이 하실래요?"

"저야 오늘 휴가라 상관없는데 수민 씨는 괜찮으세요?"

"저도 오늘 오전 반차라 점심시간까지는 괜찮아요."


상민은 휴일에 점심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겨 은영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졌다. 사실, 아직 은영과 어떤 관계도 아니다고 상민은 자신을 타일렀다.


식사장소는 수민의 회사 근처로 이동하여 정하기로 했다. 상민의 차에 자연스레 수민이 조수석에 앉았다.

상민은 안전벨트를 매는 수민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그녀의 굴곡 있는 몸매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애써 시선을 피해 운전에 집중하였다.


그녀는 증권사에 근무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상민의 회사 사무실과 상당히 가까웠다.


"매번 주변을 돌아다니는데 여기에 증권사가 있는지 몰랐네요."

"객장에 오는 젊은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내가 그래도 젊은 축에 끼긴 하나 보네요." 상민은 멋쩍게 웃었다.

"그저, 젊다는 이야기에 행복해 하는 것 봐서는 젊지 않은거 같아요." 수민은 상민을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놀렸다.

"뭐 먹고 싶어요?"

"삼숙이탕 한 번 먹어봐요."

"강릉 토속음식인가요? 한 번도 안 먹어 본 것 같은데요."


그들은 시장 상가건물 2층에 위치한 어느 노포집에 들러 음식을 주문했다.

"국물은 알탕 베이스고 아귀와 일반 생선의 중간 되는 식감이지요." 수민은 사전설명을 늘어놓았다.

"강릉 현지인과 다니니 새로운 것을 알게 되네요. 분위기만 봐서는 수민씨가 더 아재 입맛 같아요."

상민은 수민이 유머에 미동도 반응하지 않자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증권사 다니시면 투자를 잘 하시겠네요."

"글쎄요. 그랬으면 회사를 다니지 않았겠지요."

"저도 한 때 투자를 많이 했어요." 상민은 갑작스럽게 자기 고백을 했다.

"어떤 자산에 투자했나요?" 수민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10년 전에 처음 주식투자를 했지요. 그랬는데 비극이 시작되었지요. 지금은 상장 폐지된 해운사에 올인한거에요."

"왜 그랬어요? 내부 정보라도 가지고 있었나요?"

"아버지가 선원이셨기에 해운업에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지요. 국가 기간산업이라 정부에서 대마불사 논리로 지원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거에요."

"종목과 사랑에 빠지셨군요" 수민이 안타깝게 말했다.


상민이 침묵하자 수민은 이어서 질문했다.

"그러면 그때는 결혼했을 때인가요?"

"신혼 때였습니다. 주택담보대출까지 받아 억대로 투자했는데, 결국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어요."

상민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랬군요. 그 당시 아내 분이 이 사실을 알았나요? 아마 몰랐을 것 같은데."

"네, 몰랐지요. 결국 아내가 회사에 제출하는 서류 때문에 등기부등본을 발급하면서 대출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랬군요. 그게 이혼의 계기가 되었나요?" 수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제적인 부분도 문제였지만 물론 성격 차이도 컸습니다. 3년 연애 후 결혼이라 성격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서로 알고 있었지요."

"예정된 파국이었던 거네요." 수민이 감상평을 말했다.

"아내는 결혼 실패로 인한 우울증이 생겼습니다. 회사 발령으로 타지에 이사를 가면서 처음 생긴 대출은 자연스럽게 정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도파민 중독이었네요. 저희가 좋아하는 고객 유형이세요." 수민은 농담으로 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고 싶었다.

"신축 아파트를 판 돈으로 대출을 갚고 나니 가격을 맞출 수 없었습니다. 구축 아파트 전세살이가 시작되었지요. 본전 욕심에 이번엔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했습니다. 이번엔 코인에 손을 댔고, 선물(Futures)까지 했지요."

"왠지 <오징어게임> 참가자 느낌이 드네요." 수민이 안쓰럽게 말했다.

"네, 저는 고객이나 회사 자금에 손을 댄 것은 아니라 회사는 잘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했지요."

"그렇게 이혼을 하셨군요."

"네, 그 이후 지난한 과정은 수민 씨도 잘 아실거라 생략하겠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이는 없었습니다."


수민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상민에게 질문했다.

"저도 이혼하게 된 사유가 궁금하지 않아요?"

"글쎄요. 원하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원하시면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냥 저는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면 별로 재미없지요? 저는 아이 문제 때문이었어요. 전 남편은 아이를 원했고, 저는 원치 않았어요."

"그랬군요. 결혼은 두 문명 간의 충돌 같습니다. 이를테면 석기시대에 머물던 아즈텍 문명과 화승총을 갖춘 스페인 왕국의 만남 같은 것이지요."

"네, 백신을 갖추기도 전에 도시는 이미 잿더미가 되었지요. 그걸 이혼이라고 부르나 봐요. 저는 그래도 전 남편과 친구로 지내고 있어요."

"네, 저처럼 유책 배우자가 없어서 아닐까요?" 상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친구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아참, 재미있는 사실 알려드릴까요? 전 남편을 상민씨도 벌써 여러 번 봤어요."

"신형규 씨 맞나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상민은 살짝 충격에 빠졌다.

"상민씨한테 괜히 시비 걸려는 모습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남자들이 갖고 있는 부질없는 소유욕 아닐까 싶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께요."

"아니에요. 그 정도로 싸울 정도로 제가 무뢰한은 아닙니다. 아니면, 소심한 사람인지도 모르겠군요."


수민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간 상민은 그녀가 빌려준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었다. 소설가는 자신이 장애아를 낳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주인공을 장애아를 둔 부모로 만들었다. 작가를 닮은 주인공의 내면은 글로 쓴 메소드 연기와 다를 바 없었다.


문득 그가 작중 아내를 알코올 중독자로 설정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상민은 작가의 소설을 읽은 겐자부로의 아내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나를 닮은 기괴한 초상화를 보는 기분이었을까? 그런 묘사를 담은 책으로 남편이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녀는 과연 진심으로 남편을 칭찬해 줄 수 있을까?


다음날은 토요일로 예정대로라면 이종구가 퇴원하는 날이다. 상민은 은영에게 연락해 보고 싶었지만 어제 수민과의 짧은 만남이 가져다 준 미안한 감정 때문에 그저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은영이 아니라 뜻밖에도 이중민이 전화를 했다.


"상민씨,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그의 목소리는 밝아 보였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덕분에 괜찮습니다. 딸이 상민씨 블로그를 전달해 주어서 잘 읽었습니다."

"시간 내어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 번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되실까요?"

"아, 곧 이사도 가셔야 된다고 들었는데, 제가 폐를 끼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건강도 편치 않으실텐데."

"이사는 은영이가 도와주고 있고, 제가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쁜 분은 팀장님 아니실까요? 저한테 시간을 할애해 주시면 그래도 제 남은 생을 통해 얼마간 도움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상민은 별 수 없이 중민과 약속을 일요일 점심으로 정했다. 이후 은영에게 연락은 없었다. 다음날 중민은 상민과 중앙시장에 있는 오래된 보리밥집에서 만났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어제 퇴원하신건가요?" 상민은 물었다.

"아니요. 통원치료 받으러 잠시 병원에 들렀을 뿐입니다." 중민이 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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