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민은 산책을 마치고 영일과 미리 예약해둔 횟집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했다.
영일에게 전화가 왔다. 잠시 자리를 벗어나 통화를 마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원래 내일까지 너랑 놀려고 했는데, 와이프 연수 일정이 바뀌어서 저녁도 못 먹고 가봐야겠어. 미안하다."
"응, 그래. 당연히 임신한 아내가 우선이지. 그럼 어디로 데려다 줄까?"
"응, 강릉역으로 다시 가줘. 정말 미안하다."
상민은 친구의 아내와의 강원도 여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영일의 아내는 결혼식장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불편은 관계의 독이다.
"잘 지내." 영일을 강릉역에 바래다주고 상민은 예약을 취소하는 대신 홀로 횟집으로 갔다. 당연히 혼자 식사를 해야 할 처지였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은 없었다. 워낙 혼밥에 익숙해져 있기에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주인공에 빙의하여 '우마이(うまい, 맛있다)'를 속으로 되뇌면서 식사를 하면 된다.
상민이 예약한 횟집은 오마카세처럼 그날 들여오는 생선을 횟감으로 쓰는 식당이다. 제일 작은 사이즈로 주문해도 2명이 먹어야 한다. 1/3 정도 먹었는데 이미 배가 불렀다. 소주를 주문해 마셨는데 술이 왠지 더 달았다. 상민은 한 병을 급하게 마시니 취기가 돌자 뇌신피질에서 변연계로 신체의 통제 주체가 바뀌었다.
문득 상민은 구도의 길을 가는 탁발승이 아닌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욕망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아니면, 바지 남대문이 열린 것을 귀족 부인이 지적하자 윈스턴 처칠이 했던 농담처럼 '비어있는 새장 상태'일까?
상민은 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차례 신호음이 걸리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상민은 전화를 끊었다. 이윽고 은영이 전화를 다시 상민에게 걸었다. 상민이 받지 않자 은영에게 문자가 왔다.
"어디에요? 저도 강릉이에요."
상민은 기대하지 못한 답변과 취기가 뒤섞여 순간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
"지금 그럼 볼 수 있을까요? 저녁은 드셨나요?" 상민은 얼마간 망설임 끝에 답장했다.
"먹었어요. 전에 마지막에 만났던 카페에서 봐요. 주소 적어드린 문자는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지요?"
은영은 얇은 재킷을 걸친 원피스 차림이었다. 미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상민은 헬스장을 가는 복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서로 다른 곳에 가다 우연히 만난 사이 같았다.
상민은 술을 주문했다. '광란의 1920년대'를 묘사했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등장했던 하이볼 2잔. 개츠비 시대에는 에어컨이 없어 특급 호텔에서도 얼음으로 더위를 견디는 구절이 나온다. 상민은 21세기의 기술 진보, 취기로 달아오른 체온을 식히는 에어컨의 대중 보급에 감사했다.
"제가 술을 마셔 급하게 택시로 오느라 옷을 갖춰 입질 못했네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옷을 너무 과하게 입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은영은 상민에게 묘한 웃음을 던졌다.
"선약도 없이 갑자기 불러서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은영 씨가 오실 줄 몰랐습니다." 알코올의 힘을 빌어 상민도 거침없이 답했다.
"며칠 전에 아버지와 식사를 했습니다. 사무실에 직접 찾아오셨어요."
"알고 있습니다. 폐를 끼쳐드린 것 같네요. 대신 사과드릴께요."
"어차피 한 번 뵐 것이라 생각해서 괜찮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 머물고 계시나요?"
"고모 댁에 잠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불편하지요. 병원 근처로 방을 구하고 싶어하십니다. 제가 몇 군데 전세 매물을 알아보고 있고 이사를 준비 중입니다." 은영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은영 씨가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시나 보네요." 상민은 은영에게 중민이 가진 달의 뒷면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아버지 형편이 어려우셔서 제가 좀 돕는 편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문득 상민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생각났다. 기억을 잃어버린 아버지인 마네트 박사를 구하는 딸 루시. 상민은 자신이 어쩌면 루시를 도와주는 헌신적인 늙은 은행 직원 로리 역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과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가셨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은영 씨도 글을 쓰시나요? 보통 재능은 유전되는데."
"저는 글을 쓰지 않아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상민은 은영의 답을 통해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아챘다. 아마도 중민의 경제적 고난의 시작은 실직이었겠지만 서점 폐업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독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드는 것에 비례하여 동네 서점은 물론이고 대형 서점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주인공 와타나베의 여자친구 미도리가 서점집 딸이다. 어쩌면 디킨스의 루시 보다는 하루키의 미도리가 적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은영의 아버지 중민이 두 소설의 세계관을 섞었는지 모른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프랑스인 박사와 일본인 서점 주인.
상민은 다음 대화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은영이 입을 뗐다.
"아버지가 상민 씨가 작가 지망생이라는 이야기를 하시며 글을 읽어보고 싶다고 하시네요. 혹시 최근에 쓴 글이 있으시나요?"
"개인 블로그에 틈틈이 쓰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블로그 링크를 문자로 보내 드릴게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쓰신 글을 읽고 나서 상민 씨가 원하면 피드백을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병원에 가는 매주 화요일만 아니면 언제든지 괜찮다고 하세요."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상민은 은영의 커다란 눈을 응시하고 짧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은영 씨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네, 제 나이는 32입니다. 상민 씨와 10살 차이 나네요. 그러니 편하게 말하셔도 되요."
"그러면 서로 편하게 말 해요." 상민이 수락했다.
"응, 그래." 은영이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무의미했다. 상민은 대화는 20% 언어와 80% 비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피즈 부부가 쓴 <보디 랭귀지>에 나온 대목이 떠올랐다.
어떤 남자 혹은 여자와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던 것은 화법이 문제가 아니다. 그저 상대방이 당신에 대한 비호감 때문에 호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갈까?" 상민이 물었다. 둘은 이미 술을 마셨다.
상민과 은영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살짝 둘의 손이 스쳤다.
별안간 은영의 전화가 울렸다. 잠시 상민과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상태가 좀 안 좋다고 고모한테 연락이 왔어. 지금 병원에 모셨다고 하니 거기로 가봐야겠어." 은영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응, 내가 택시 타고 병원 앞까지 같이 가줄까?"
"아니 괜찮아. 혼자 가도 돼. 택시 앱(APP) 불렀어."
"그래, 그럼 아버지께 안부 좀 전해드려. 별 일 없으셨으면 좋겠어." 상민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덧붙였다.
"아참, 내일 나 휴가라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전화해. 그냥 쉬는 날이라 딱히 일정이 없어서."
"응, 그럴께."
은영과 헤어진 상민은 모처럼 성취감에 들떠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까지 걸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들뜬 기분을 이어가고 싶어 오뎅바에 들렀다. 이 주점은 서울에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지방에 남아있는 저가형 프랜차이즈 업체이다. 강릉은 중력과는 무관하게 시간이 조금 늦게 흐르는 것 같았다.
술집에 들어서자 마자 상민은 신종구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지난 번 모임 멤버인 이수민, 신형규도 함께였다.
"와, 이런 우연이. 술을 얼마나 마시면 술집에서 또 마주치지요?"
"지난 번에는 치킨집이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네요. 표정이 신나 보여요." 수민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별 일 없습니다."
"이제 구면인데 격식 차리지 마시고 합석 하시는 것 어때요?" 신종구가 권했다.
"사장님, 여기 맥주 500cc 한 잔이요." 수민이 상민 답변을 듣기도 전에 주문과 동시에 자리를 마련했다.
반면 신형규는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이왕에 저희 멤버로 가입하시는게 어때요?" 신종구가 물었다.
"아, 저는 오토바이가 없습니다." 상민은 간결하지만 정중하게 답했다.
"이 멤버 구성은 독서 동아리라서, 오토바이는 필요 없어요." 수민이 거들었다.
"그래? 언제부터 그랬는데?" 형규가 따지듯이 반문했다.
상민은 형규의 견제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도 나머지 사람들의 호의를 무시할 순 없었다.
"은영씨와 무슨 사이에요?" 형규가 상민에게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수민이 형규를 살짝 책망했다.
"지금은 아무 사이 아닙니다." 상민은 얼떨결에 자신을 변호했다.
"지금은." 형규가 단어 하나를 작은 목소리로 되짚었다.
"이제 곧, 단오제를 하겠네요. 아마 처음 보시겠네요?" 신종구가 화제 전환을 위해 운을 뗐다.
"네, 남대천 따라 축제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저희 회사에서도 지역 최대 행사라 홍보 부스에 참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주최 측에 견적을 물어보니 비용이 예상보다 너무 커서 포기했어요."
"축제가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것 같네요." 수민이 호응했다.
"강릉에는 무속 신앙이 발달되어 있더군요. 굿을 이렇게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 하는 것은 처음 봅니다." 상민이 소감을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점 한 번 안 본 사람 있겠어요? 다들 개신교니, 가톨릭이니, 불교니 해도 마음 속 진짜 신앙인지도 몰라요."
이번엔 신종구가 웃으며 답했다.
"얼마 전에 태백에 간 적이 있습니다." 상민은 술기운에 대화의 주도권을 갖고 계속 이야기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잠시 했는데 하필 성황당이 있었습니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나무 아래에 지어진 사당이었습니다. 성황당 안은 처음 봐서 잠시 살피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떤 아주머니가 저에게 여기 쓰실 거냐고 말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를 잘 못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그 쪽을 '박수'로 봤나 보네요." 수민이 조롱을 띄며 답했다.
"더 기묘했던 것은 그때 성황당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주차해 놓은 제 차 뒷바퀴에 와서 오줌을 싸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강아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상민씨도 영(靈)적인 뭔가 있나 보네요. 강릉이 잘 맞으실 것 같아요."
"그런데 자기 미래는 자신 스스로만 알 수 있고 타인이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상민은 진지하게 답했다.
술자리는 예상 외로 짧게 끝났다. 계산은 신종구가 하고 주점 앞에서 뿔뿔이 헤어졌다.
수민이 가기 전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고 상민을 붙잡았다. 둘은 잠시 골목길을 걸었다.
"은영이와 잘 되어가시는 것 같네요. 맞지요?"
"아, 네.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상민은 당황해서 변명같이 답했다.
"은영이 아버지를 모시기로 해서 이달 중에 강릉으로 이사 올 것 같아요."
"그랬군요. 그것까지는 몰랐습니다. 아, 그런데 병원에 가보지 않으셔도 되나요? 사실 오늘 은영 씨를 잠깐 만났는데 급하게 연락 받고 병원으로 갔거든요."
"아, 벌써 은영이를 만났군요? 근데, 저는 그런 이야기를 못 들었네요. 지금 한 번 전화해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민의 의아한 표정이 마음에 걸린 채로 상민은 그녀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