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기행-9

by pathemata mathemata

상민은 은영의 거짓말에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것을 은영의 아버지인 중민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존심 상한 일이었다. 따라서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복수를 하고자 했다.


"어제 우연히 수민 씨와 도서관에서 만났습니다."

"아, 그래요? 강릉이 정말 좁긴 하네요."

"수민 씨가 책을 좋아하더군요. 휴가를 내고 도서관에 갈 정도면 중증 활자중독입니다." 상민은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중민은 다음 말을 기다린 채로 잠자코 상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수민 씨는 독서 모임에 가입해 활동 중인데, 우연히 그 모임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게 누굴까요?" 중민은 체념한 듯이 판결을 기다리며 말했다.

"신종구씨입니다."

"네, 느닷없이 수민이 이야기를 꺼낼 때 어느 정도 예감을 했습니다. 종구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은데 인간은 각자의 입장이 존재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종구를 어떻게 평하든지 하나의 사건에 대해 그의 입장도 별도로 존재하겠지요."

"제가 두 분의 관계를 추궁하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불편했다면 죄송합니다." 상민은 분노에서 미안함으로 감정이 바뀌었다.

"아니에요. 제가 팀장님을 만난 것이 작가로서의 성장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부끄러운 치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팀장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충분히 의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상민은 중민의 호의를 배신한 것이 몹시 부끄러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제가 교수로 있었을 때 일입니다. 문예창작과 특성 상 도제식으로 수업을 가미하게 되지요. 물론 수강생이 수십 명이라 모든 학생에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종구는 특히 필력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탁월했습니다. 가히 천부적이라 불릴 만 했지요."


상민은 차려진 식사를 먹으며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중민은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과거를 회상해 나갔다.


"저는 그 친구가 등단할 수 있도록 별도의 과제를 주어가며 열심히 글의 첨삭을 도왔습니다. 신종구의 집은 부유했으나 저는 그가 금전적 호의를 베풀려고 해도 일절 받지 않았습니다. 과분한 비유지만 귀족 청년들에게 수업료를 안 받은 소크라테스처럼 말이지요.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소개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전미영으로 당시 경영대생 2학년이었습니다."

"그녀가 문제의 시작이었겠네요." 상민은 나직이 호응했다.

"서로 안면을 트고 나서 세 명은 종종 만났습니다. 어느날 미영이 혼자 교수실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전공은 다르지만 자신도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다고 하며 작품을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중민은 말을 이어나갔다.

"미영은 남자친구인 신종구에 비해 타고난 문재(文材)가 있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거절하지 않고 저는 그녀의 지도를 받아들였습니다. 미영은 고맙다고 자연스럽게 가끔 단둘이서 밥을 먹거나 교수실에서 작문 과외를 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혼이었고 나이도 서른이 채 안되어 젊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사제지간이라는 벽을 크게 느껴 철저하게 선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선이 무너졌나요?"

"신종구는 등단을 위해 군 입대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작가로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집안 반대가 심했지요.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는 강릉 내에 지역 유지로 손꼽히는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작가 등단 실패로 그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잠시 꿈을 접고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민은 감정이 복 받쳐올라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식당을 나가 중민과 상민은 월화거리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여전히 중민의 식사는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채였다. 상민이 중민을 힐끗 보자 그가 전보다 훨씬 수척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식사가 입에 안 맞으셨나요?" 상민은 잠시 화제를 전환했다.

"맛이 좋았습니다. 다만, 부정하고 싶어도 갈수록 소화력이 달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상민은 자신의 말 실수를 후회했다. 눈이 부시는 일요일 오후였다. 카페 2층 통창이 열려있어 에서 행인들이 계속 오가면서 떠드는 소리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행인들에게 죽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영과 저는 심리적이자 실체적인 장벽이 사라지길 기다린 듯 했습니다. 작문 과외는 핑계였고 둘의 만남은 정식 데이트가 되었습니다. 신종구는 군입대 후 100일 휴가(신병위로휴가)를 통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기색이었습니다."

"그 뒤엔 어떻게 되었나요?"

"미영은 저와의 관계로 인해 혼전임신했습니다. 그녀는 아이 때문에 대학을 중퇴해야 했고 제가 책임지기로 하여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태어나 아이가 은영입니다."

"신종구 씨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상민은 비극적 서사보다는 당장 순수한 호기심이 우선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호기심 혹은 악의 순진성이었다.

"군 생활 1년도 안되어 미영에게 전화 통화로 이별과 결혼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신종구가 탈영할까 저는 두려웠고 죄책감이 컸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종구의 존재는 잠시 잊어버렸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 종구가 전역할 때가 되자 다시 걱정이 커졌습니다."

"그랬군요. 종구 씨는 전역 후 실제로 어떻게 반응했나요?"

"종구는 전역하고 짧은 머리로 밝게 인사하며 저에게 먼저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지요. 그는 지나간 일이라고 결혼을 축하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작품 활동은 그만 두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크게 안도했습니다."


이중민은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바깥을 응시했다. 조금 눈이 충혈된 채로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시간이 흘러 종구가 졸업을 앞둘 때였습니다. 종구는 전역 이후 제 수업을 수강 신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빠져나간 빈 강의실에 종구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 전까지 운 좋게도 종구와 마주친 적은 없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착각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종구는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며 은영이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자라나는 내 아이, 은영의 얼굴이 종구와 무척 닮았던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잠시 감정을 추스리던 중민의 표정은 마치 생명의 온기를 잃은 시체와 같았다.


"은영이는 어릴 때부터 참 예뻤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조금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아이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제 자식임을 추호도 의심한 적 없어 최선을 다해 키워냈습니다. 그런데 종구의 단순한 안부 인사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이아고처럼 저에게 벗을 수 없는 의심을 주기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퇴근하고 저녁을 차리는 미영에게 곧바로 은영이 누구의 아이인지 물었습니다. 미영은 식탁으로 들고 오던 된장찌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사방에 뜨거운 국물과 강릉이 자랑하는 두부가 튀었습니다. 그것으로 답은 충분했습니다. 사실 저는 친자식처럼 키워 온 은영을 사랑했기에 그녀의 과거는 묻어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구는 이 추악한 진실을 문인들과 학계에 알려 자신조차 조소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폭로라고 해야 말이 거창하지 한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충분했겠지요."


"한국인이 좋아하는 감정, 남의 불행에 기쁨을 느끼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겠지요. 젊은 등단 작가이자 교수의 추문을 싫어할 사람들이 없었겠네요." 상민은 깊이 그를 동정했다.

"네, 저는 그때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든 지금이라면 어떻게 버티겠지만 소문의 힘은 무서웠고 제 자존심은 컸습니다. 호기롭게 교수직을 사임하고 얼마 안되는 퇴직금으로 서점을 개업하고 틈나는 대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저는 은영이가 비록 남의 자식이지만 가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교단을 떠난 이후 아내와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종구의 안부를 접한 날부터 아내와 육체적 관계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 허울 뿐인 가정을 최대한 지켜내려 노력했지요."

"왜 그런 불합리한 선택을 하셨나요?" 상민은 의아하여 물었다.

"종구에게 속죄하는 기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고통을 감내한 것이겠지요. 뭔가 도덕적 우월감으로 도덕적 결점을 상쇄 시키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집에서 부모를 학대하는 사람이 밖에서 어르신 봉사활동에 열심인 것처럼 말이지요." 중민은 잠시 침묵 끝에 숨을 참고 입수하듯 중민은 이야기의 마지막에 다가갔다.


"그런데 물적 토대가 붕괴되니 모든 이상(理想), 신기루는 끝났습니다. 아시다시피 독서 인구는 해마다 줄었고 서점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살던 집은 팔아 전세에서 월세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이 붕괴 과정은 페인트 칠한 철의 산화 과정처럼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작가로서 오히려 고통을 창작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상민은 그의 말에 박차를 가했다.

"프로이트라면 그렇게 해석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 핏줄에 대한 사실을 안 이후 글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제 비극을 복제나 모방으로 쓰는 일은 더욱 싫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 기존에 제가 냈던 책은 절판 되었고 이미 잊혀진 신세가 되었지요. 굳이 절필을 선언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서점을 폐업하는 날은 은영이 고3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살던 집에서 밀린 월세 때문에 쫓겨나 아내와 남은 가족들은 살 집이 없어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내가 건낸 협의이혼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은영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꾸렸습니다. 저는 일용직으로 남은 생을 버텨나갔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그나마 안정적인 경비를 하다가 팀장님을 만났지요.

저는 팀장님의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처럼 내면의 고통을 안고 있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상처를 드러내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가가 되실 것입니다."


상민은 철저하게 자기를 치부를 드러낸 중민이 안쓰러워 차로 임시 거주지까지 바래다준다고 했다.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강릉은 휴일에 영업하는 헬스장이 많지 않다. 신종구도 아마 자신의 취미인 바이크 라이딩을 떠났을 것이다. 신종구 혹은 은영의 진짜 아버지의 존재는 은영이 그에게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잠식했다.

다음날 상민은 퇴근 후 곧바로 헬스장에 갔다. 신종구는 상민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아, 오랜만에 운동 나오셨네요. 반가워요!"

"사장님, 오늘 안 바쁘시면 술 한 잔 어떠세요? 술 마실 사람이 딱히 없네요." 상민은 마음이 조급해 용건부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부터 강릉단오제가 시작되어 우리 동호회 멤버들 한 번 뭉치기로 했어요. 통근길 지나가다 남대천에 끝도 없이 몽골텐트 쳐진 것 보셨지요? 단오제는 아무래도 감자전에 막걸리가 기가 막히지요. 저희랑 합류 하실래요?"

"아, 좋습니다. 대신 제가 사장님께 개인적으로 물어볼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 끝나고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네, PT만 아니면 뭐든 좋습니다. 그건 따로 돈 내셔야 하니까." 신종구는 넉살 좋게 웃었다.


상민은 은영에게 전화했다.

"단오제에 독서동아리 회원들이 함께 술 마신다던데 나도 같이 할려구. 이따 같이 볼까?"

"수민한테 들었어. 나도 가려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어. 이따 봐."


상민은 이 비공식적인 부녀와의 삼자대면을 내심 기대하였다.

이전 08화강릉기행-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