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기행, 끝.
헬스장과 단오제 축제공간은 걸어서 10분 정도로 가까웠다. 이미 단오제 때문에 인근 갓길은 불법 주차한 차들로 가득 찼다. 상민은 신종구와 같이 걸어가기로 했다.
상민은 도보로 이동하는 시간이 겨우 10분이라 마음이 급했지만 일단 느긋한 척 했다.
"서울에서 본 지역 축제는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초고령화 사회답게 유권자들을 위한 트롯트 가수 공연이 주류로 특색 없는 행사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런데 행사 일주일 동안 차례대로 다양한 굿 판을 벌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네, 강릉에서 굿 관람은 처음이시겠네요. 원래 강릉이 무속 강국이에요." 신종구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상민은 망설였지만 점점 축제 장소와 가까워지는 것에 조바심이 나 이야기를 꺼냈다.
"기분 나쁘게 듣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나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아, 혹시 연애 이야기 같은 건가요? 나 동호회 안에서 정분이 나도 전혀 상관 안 하는 스타일인데요?"
"제가 누구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상민은 반문했다.
"수민이 아니에요? 둘이 항상 죽이 잘 맞던데. 난 응원해요." 종구는 놀리듯이 대꾸했다.
"아닙니다." 상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러면 저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뭘까요?" 종구의 표정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저는 수민이의 사촌인 은영 씨에게 호감이 있습니다."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따로 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종구가 상민의 표정을 살피며 수를 읽히지 않으려는 노련한 50대의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상민은 웃을 수 없는 유머의 마지막 펀치라인을 날렸다.
"뭔가 이야기를 듣고 오셨군요. 그런데 저도 마찬가지로 상민 씨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상민은 허를 찔린 역습에 당황해 답을 못했다. 그 사이 종구는 단어와 문장으로 된 잽을 날렸다.
"은영이에 대해 상민씨는 어느 정도 아시나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본인에게 꼭 물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상민은 종구의 의미심장한 말과 미소에 심장이 빨리 뛰었음을 느꼈다. 침묵 속에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는 사이 둘은 동호회원들과 만나기로 한 목적지인 축제 안내소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상민을 발견한 수민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수민의 옆에는 은영이 있었다.
"둘이 안 친한 티 팍 내는 중이네요." 수민은 둘 사이 어색한 기류를 느끼고 짓궂은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풀어주려 했다.
"형규 씨는 아직 도착 안 했나 보네요." 그가 신경 쓰이는 상민이 답을 했다.
"단오 날이 대목 중 대목이라 형규 씨가 여기서 운영하는 전집 매장에 가서 팔아주기로 했어요." 수민이 대답했다.
모인 일행은 신형규가 운영한다는 전을 파는 몽골리안 텐트 여러 개를 이어 만든 매장으로 갔다. 그리고 종구가 추천했던 감자전과 단오주라고 불리는 축제 막걸리를 주문했다.
"술은 더 못 드리고 안주 넉넉히 챙겨줬으니 남기지 말고 많이 드세요." 형규가 자본주의 미소를 띄며 동호회원들을 응대하고 황급히 사라졌다. 상민은 내심 안도했다.
"어째서 오라버니가 오늘 말수가 없네요." 수민은 종구를 의식해 말을 건넸다.
"응, 원래 나 과묵한 사람인 것 몰랐어?" 농담으로 종구는 받아쳤다. 그는 입을 활짝 벌렸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수민은 급하게 상민을 붙잡았다. 순간 은영이 상민을 쳐다보고 다시 바닥을 응시했다. 은영은 아직까지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수민과 상민은 잠시 전집에서 벗어나 수많은 인파들 틈에 끼어 천변 쪽 한적한 곳에 앉았다. 남대천은 건너편 텐트에서 비추는 불빛들로 붉게 물들며 점멸 중이었다.
"제가 지난 번 이야기했던 내용을 혹시 종구 오빠에게 이야기했나요?"
"네, 그럴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상민은 수민이 너무 빨리 눈치채서 당황스러웠지만 변명하고 싶진 않았다.
"어느 정도까지 알고 어디까지 이야기 하신 거에요?"
"저는 묻고 싶어요. 저한테 왜 그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까?" 상민이 반문했다.
"시치미 떼봐야 소용 없겠지요. 이미 짐작했을 테니깐. 상민 씨가 안타깝게도 은영이에게 관심이 많기 때문이지요." 수민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수민씨가 솔직하게 답해줘서 저도 솔직하게 진행 상황을 말해줄께요. 너무 오래 있으면 일행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으니 간단히 말할게요. 이중민 씨 입을 통해 은영의 법적인 아버지인 것, 그리고 신종구 씨가 친부인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종구 씨에게 그저 은영씨에게 호감이 있으며 그 사실을 친부에게 일종의 알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물론 암시적으로 그에게 알렸지만요."
"사실상 종구 오빠한테 당신이 알고 있다고 말한거군요."
상민은 수민의 말에 침묵했다. 대화를 마친 이들은 전집으로 돌아갔다.
"아니, 둘이 무슨 재미를 보다 온거야?" 형규가 바쁜 와중에도 그들을 놓치지 않고 책망하듯 말했다.
"신경 끄세요." 수민은 재빨리 응수했다. 그런데 남은 일행들이 자리에 없었다.
"다들 어디 갔어요?"
"말 해줘야 다시 모임이 건전해지겠지. 종구 형이 불꽃놀이 보러 가자고 잽싸게 감자전을 먹어 치우고 은영이랑 저기 단오섬으로 갔어. 거기로 가면 될거야."
상민은 핏줄로 이어진 부녀가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니, 은영이 그를 생물학적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지 조차 불분명했다.
단오섬은 단오제 기간 중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임시 교량인 섶다리로 이어진다. 불꽃놀이를 기대하는 수많은 인파가 다리를 메워 걷기 힘들 지경이었다. 다리는 한 명이 지날 수 있을 외길이었고 단오섬은 수용 인원을 초과할 정도로 비좁았다. 자연스럽게 수민과 상민은 사람들에 끼어 고립되었다. 별 수 없이 그들은 전진을 포기하고 불꽃놀이가 끝나면 이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은영이가 종구 씨가 친부인 것은 알아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를까 봐. 어릴 때부터 은영이는 아버지랑 얼굴이 안 닮았다는 말을 무수히 들어왔거든요. 어느 날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은영이는 종종 아버지에게 물었나 봐요. 삼촌은 매번 부정하다가 마침내 은영이에게 답을 해주었구요."
"은영 씨가 이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군요."
"아니요. 삼촌이라면 아마 평생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 거에요. 그때 경제적으로 파탄 지경에 몰린 삼촌이 딸이 대학 진학을 위한 고육지책이었어요. 삼촌은 딸에게 친부를 알려 주었다고 숙모에게 전했지요. 종구 오빠는 숙모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친딸인 은영의 생활비며 학비를 대려고 했지요. 그런데 은영은 일체의 도움을 거부했어요."
"아마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버지의 헌신 때문이었겠지요?" 상민은 물었다.
"그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요. 확실한 것은 은영이도 삼촌처럼 자존심이 셌지요. 혈연은 남이지만 성격이 닮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 종구 오빠랑은 신체적인 장점을 물려받았지요. 예쁜 얼굴과 몸매를 물려받아 지금은 필라테스 강사를 하고 있지요." 수민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살짝 후회하는 듯 했다.
'타인이 부러우신가요?' 수민이 일전에 말했던 말을 돌려주고 싶었지만 상민은 입 속에 삼켰다.
불꽃이 밤하늘에 보이는 작은 별들의 환영을 몰아내고 점멸한다. 초반 일 분은 모두의 환성을 지르게 한다. 그러나 점차 지겨워진다. 그리고 폭죽이 내는 소음이 예민한 귀를 거스르게 한다. 상민은 큰 차이 없는 떠들썩한 반복이 괴로웠다.
"몇 분 남았을까요?" 상민은 수민에게 지루한 듯 말을 걸었다.
"저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나 보네요." 수민은 체념한 듯 말했고 상민은 그녀의 자조적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밝은 불꽃과 대비되는 어두운 침묵이 흐른 뒤 불꽃 축제는 끝났다. 이제 파장 시간이 다가왔다. 단오섬을 벗어나려는 사람들 틈에서 상민은 필사적으로 은영을 찾았다. 수민은 그런 상민을 말 없이 지켜보다 그의 곁을 떠났다.
누군가 상민의 손을 붙잡았다. 은영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응, 단오섬에 있다고 해서 수민 씨와 왔는데 사람들 때문에 도저히 갈 수가 없더라."
"그러게. 다행이야. 수민은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간다는 말은 없었는데 서있느라 지쳐서 집에 간 것 아닐까? 같이 있던 종구 형님은?"
"응. 속이 안 좋다고 방금 전에 인사하고 가셨어."
"그래, 우리 둘만 남았네." 상민이 멋쩍게 웃었다.
상민과 은영은 불이 꺼져 가는 텐트들을 뒤로 하고 남대천을 걸어갔다. 축제 장소를 벗어난 두 남녀는 잠시 멈추어 어두운 하천을 바라보았다. 관람객들은 줄어들었지만 왁자지껄한 소음이 간간히 들렸다.
"할 말이 있어." 상민이 말했다.
"응,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 그런데 오늘 말고 다음에 하면 어때?" 은영이 답하고 상민에게 키스했다. 상민은 체념한 것처럼 그녀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다.
이혼 후 상민은 수 년 동안 타인의 온기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체온이 실재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었다.
"나니와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세구네. 그냥 키스일 뿐인데 죽음이 임박한 것 같았어?"
"니가 내가 인용한 말을 바로 알아채는 것이 더 놀라운데."
"왜냐하면 나는 박학다식한 아버지를 닮았으니까." 은영은 한 번 더 상민에게 입술을 포갰다.
상민은 두 번째 기습을 반갑게 맞이하며 그녀가 말한 아버지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때 은영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엔 상민이 있는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래, 알겠어.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 은영은 상민에게 말했다.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어. 지금 가봐야 할 듯. 점점 손이 많이 갈지도 몰라."
"그래, 고생이 많아. 병원 입원을 안 하신다면 나중엔 간병인도 한 번 알아 보는 게 어때?"
"응. 그럴께. 아참, 내가 말 안했구나. 이사 날짜가 정해졌어. 이번 주 중에 할거야."
"그래, 내가 필요한 것 있으면 도울게." 상민은 진심을 담아 호의를 제안했다.
"아냐, 포장 이사를 예약했고 짐도 얼마 없으니 신경 안 써도 돼. 집들이 할 테니 한 번 놀러 와.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은영을 택시에 태워 보낸 후 상민은 혼자 걸어갔다. 잊고 있었던 수민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없어도 찾지도 않으시네요."
"아, 미안해요. 남은 일행을 찾다 보니 사라지셨길래 먼저 가신 줄 알았어요."
"글쎄요. 그쪽이 정신 없으시길래 자리를 비켜준 것은 맞아요."
"미안합니다. 사과를 받아주셨으면 해요."
"은영이 혹시 지금 옆에 없어요?"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상민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왜냐하면 제가 방금 전에 은영에게 전화한 사람이거든요."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상민은 불쾌함을 억누르고 말했다.
"은영이 삼촌만 케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걸 상민 씨에게 미리 말 안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말하고 말고는 은영 씨의 권리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은영 씨와 겨우 알아가는 단계일 뿐입니다."
"저와는 알아가는 단계 아니었던가요? 저와 단둘이 식사한 것은 은영이에게 이야기 한 적 있나요? 나는 상민 씨에게 선택권을 주려고 일부러 이야기 안했는데."
통화기 너머로 수민은 길게 흐느꼈다. 그녀는 상민의 답변을 기다리다 지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끝나고 침묵이 찾아왔다. 숙소에 들어간 상민은 옷을 입은 채로 욕조 속에 누웠다. 신종구가 딸에 대한 안부를 전한 날 이중민의 생각을 재현하려 애썼다.
"희생 없는 사랑은 도둑질이다(Love without sacrifice is theft. - N.N.Tal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