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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Oct 16. 2024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아메리칸 드림, 100달러 지폐의 주인공




저자는 미국 달러화 100달러의 초상화 주인이다.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얼굴은 한 번쯤 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기에 자서전을 읽기 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다. 또한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인 <아웃랜더>의 시즌 후반부 내용의 시대적 배경이 독립전쟁 당시 미국이라 그런지 상상하기 쉬웠다. 드라마 주인공의 설정 역시 프랭클린의 직업(인쇄업자 등)을 차용한 바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저자는 흔히 이신론자*로 분류되는데,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자서전에 그려진 저자의 모습은 확실히 종교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윤리를 추구하고 있고 과학적 탐구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창조주로 신의 존재는 인정하나 세계질서에 관여하진 않는다는 사상


영국에서 당시 식민지인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2세로서 저자의 직업은 다양하다. 직업 세분화가 현대만큼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저자의 독특한 점은 아니며 당대 지식인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 분야에 이렇게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는 굉장히 드물다. 이 자서전은 처음 아들에게 남긴 보다 사적인 유년 시절의 내용에서 중단되었으나 다른 그를 아끼는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계속 작성되어 사후에 출간되었다. 18세기 스마트폰이 없던 그 시절에 이미 저자는 국제적 인사였다. 다만 글의 후반부는 공적인 업적 기록에 치중하여 사생활에 대한 언급이 거의 배제되어 다소 밋밋하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원인은 구대륙 출신 귀족이 아닌 서민 출신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자수성가형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저자는 신대륙에서 (직업적 소명의식을 통한) 칼뱅식 청교도 자본주의가 가능함을 알렸다. 이 자서전은 그 자체로 저자의 성공 방정식에 대한 뛰어난 홍보매체였다. 물론 그의 성공에 대해 겸손을 강조했기에 자신의 탁월한 능력에 대한 자만은 없다. 저자는 진실, 성실, 청렴으로 일궈낸 결과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식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모든 이들이 프랭클린처럼 뛰어난 능력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저자의 삶은 미국이라는 신생국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이어지고 있다.




인상 깊은 구절



그 후에도 한동안 이 논쟁법을 사용했지만 조금씩 사용을 자제했다. 하지만 겸손하게 내 의견을 피력하는 습관만은 계속 유지했다. 이를테면 반박해야 할 일이 있을 때나 주제에 대해 언급할 때는 ‘분명히’, ‘의심할 여지없이’ 등 의견에 독단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이러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이유로 제게는 이러저러하게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여차여차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게 이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이렇습니다”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하는 습관을 들였다. 이런 습관은 내 의견을 상대에게 관철하려 하거나, 내가 추진하려는 계획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대화의 주목적이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고, 상대를 즐겁게 하거나 설득해야 할 때, 선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독선적이고 거만하게 행동하여 자신이 행하려는 선행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늘 혐오감을 유발하고 반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하는 말의 목적, 구체적으로는 정보와 즐거움을 주고받는 일의 목적마저 허물어뜨린다. 네가 정보를 제공할 때 감정을 독단적이고 독선적으로 드러내면 상대방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상대는 여지없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상대로부터 정보를 얻어 지적 향상을 꾀하면서도 현재 의견을 고집하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면, 얌전하고 분별 있는 사람은 말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상대에게 어떤 오류가 있는지 굳이 짚어주지 않는다. 따라서 독선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상대가 즐겁기를 기대하거나 상대를 설득해 네가 바라는 동의를 끌어내기는 어렵다.



나는 인간 사이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진실함’과 ‘성실함’, ‘청렴함’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신조와 도덕관에 대해 글로 써두었고 평생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관련된 글은 지금도 내 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계시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이 어떤 행동을 금지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게 아니고, 어떤 행동을 권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의견에는 크게 공감했다. 요컨대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나쁜 것이기 때문이고, 어떤 행동을 권장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나님이나 수호천사의 자상한 손길이 더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히 상황과 환경이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 모두의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런 신념은 위험천만하던 젊은 시절 나를 지켜주었다. 



13가지 덕목



사실 나는 ‘질서’라는 덕목에서는 구제 불능이었다. 나이 들고 기억력이 크게 떨어진 지금 나는 ‘질서’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나는 완벽한 수준에 이르기를 바랐지만, 전체적으로 그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러나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을 때 내가 처했을 상황과 비교하면 완벽을 지향하며 노력한 까닭에 그나마 나아졌고 더 행복해졌다. 저명한 작가의 글을 모방하며 완벽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그 작가만큼 탁월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노력을 통해 글이 나아지며, 명쾌하고 읽기 쉬운 글을 써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역설하려고 하는 말은 간단하다. 사악한 행동은 금지되었기에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롭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므로 결국 성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에서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해지고 싶다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게 더 낫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부유한 상인과 귀족, 정치인과 군주가 있고, 그들에게는 자기 일을 정직하게 관리해줄 수단이 필요하지만, 그런 수단을 갖춘 지배자는 극히 드물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에게 청렴과 진실성이야말로 성공을 보장해주는 수단이라는 걸 젊은이들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해왔다. 



따라서 그 초선 의원의 반대가 신경 쓰였다. 그는 재산도 많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아 때가 되면 하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닐 가능성이 큰 유능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훗날 그런 의원으로 성장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굽실거리면서까지 환심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그가 무척 희귀하고 진귀한 책을 서재에 진열해두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그 책이 정말 읽고 싶으니 며칠간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 책을 곧바로 보내주었고 나는 일주일 뒤에 그 책을 되돌려주며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쪽지도 함께 보냈다.



  우리가 하원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전에는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던) 그가 나에게 아주 정중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 뒤로 그는 모든 일에서 나를 기꺼이 도와주려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우리의 우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 사례는 내가 오래전에 배운 “네가 도움을 준 사람보다, 너에게 한 번이라도 친절을 베푼 사람이 너에게 또다시 친절을 베풀 가능성이 크다”라는 격언이 맞는다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였다. 또한,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며 앙심을 품고 보복을 꿈꾸는 것보다 그 관계를 신중하게 재정립하는 게 훨씬 더 이익임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캐롤라이나에서 시도한 동업이 성공한 데 고무되어 나는 다른 지역으로까지 동업을 확대할 생각이 들었다.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올바르게 처신하던 몇몇 직공들에게 독립과 동업을 권하며 캐롤라이나 인쇄소와 동일 조건으로 각각 다른 지역에 인쇄소를 차려주었다. 대부분 일을 잘 해냈고 6년이란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는 나에게 활자를 사서 완전히 독립했다. 달리 말하면 여러 가정이 인쇄업을 생활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는 뜻이다. 동업이 다툼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지만, 이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내가 맺은 동업 관계는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원만히 끝났으니 말이다. 내 생각에는 각자 해야 할 일과 상대방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을 빠짐없이 계약서에 적어 명확히 규정해둔 덕분인 듯싶다. 따라서 분쟁이 있을 수 없었다. 동업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싶다. 계약을 맺을 때는 동업자들이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일을 하면서 책임져야 할 문제가 생기면 서로 마음가짐과 부담감이 똑같지 않다는 생각에 시기와 미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 우정에 금이 가고 결국에는 법정 소송이나 다른 불미스러운 결과로 파국을 맞게 된다. 



내가 이런 문제들에 깊숙이 개입하자 퀘이커교도에게 밉보여 의회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퀘이커교도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하원에 몇몇 친구가 있어 내 후임으로 서기직을 맡고 싶어 하던 한 젊은이가 나에게 선의의 조언을 해주었다. 다음 선거에서 나를 해임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으니 쫓겨나는 것보다는 사임해 명예를 지키는 쪽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공직자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공직을 구걸하지도 않았지만 공직이 맡겨지면 거절하지도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나는 그 원칙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공직을 구걸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지만, 절대 사직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의원들이 서기직을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한다면 나에게서 그 직책을 빼앗아야 할 겁니다. 나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언젠가 상대에게 보복할 권리까지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반응은 대단했다. 토머스 총독은 이 난로의 구조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수년 동안 그 난로를 독점 판매할 수 있도록 특허를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우 항상 고려했던 원칙, 즉 “우리가 다른 발명들로부터 큰 이점을 누리고 있듯 우리 발명품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기회를 흔연히 승낙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아낌없이 줘야 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인간은 드물게 찾아오는 커다란 행운보다 일상의 작은 이익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낀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에게 면도하고 면도칼을 깨끗이 보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한꺼번에 천 기니를 주는 것보다 그의 행복에는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프랑스 대사 하트퍼드 경의 비서였고 나중에는 국무장관 에드워드 콘웨이 장군의 비서를 지낸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도 나에게 그 서류 중에서 브래독 장군이 나를 적극 추천한 편지를 본 적이 있다고 수년 뒤에 말해주었다. 하지만 원정 자체가 실패했기 때문에 내 도움은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브래독 장군의 추천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라비아 형제단의 결혼 방식에 관해 물었다. 제비뽑기로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예컨대 한 청년이 결혼하고 싶으면 자신이 속한 모임의 원로에게 알리고 그 원로들이 아가씨를 관리하는 여성 원로들과 상의한다. 그 원로들은 자신들이 맡는 젊은이들의 성격과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어떻게 짝지어주는 게 이상적인지 잘 판단할 수 있다고 인정해 대체로 그들 결정을 따랐다. 그러나 그 청년의 짝으로 두세 명의 아가씨가 똑같은 정도로 적절하다고 판단되면 제비뽑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짝짓기는 당사자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이 아니어서 불행한 결혼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박하자 나를 안내하던 형제가 “당사자들이 스스로 선택하더라도 그럴 수 있지 않나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키너슬리 씨에게 번개와 전기의 성질이 같다는 논문을 써서 보냈다. 지인이며 왕립학회 회원이던 미첼 박사에게도 그 논문을 보냈다. 미첼 박사가 내 논문을 학회에 소개했지만 전문가들에게 비웃음만 받았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하지만 포더길 박사는 내 논문을 읽고는 그냥 묻어두기에는 아깝다며 인쇄해 배포하라고 조언했다. 한편 콜린슨 씨는 내 논문을 에드워드 케이브(Edward Cave, 1691~1754)에게 보내 그가 발행하던 『젠틀맨스 매거진』에 게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케이브는 내 논문을 소책자로 출간하기로 결정했고 포더길 박사는 추천사를 써주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출판업자 케이브의 판단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나중에 다른 실험들도 덧붙여지면서 소책자가 4절판 책으로 커졌고 5판까지 발행되었다. 따라서 그는 인쇄비만 부담하고 내 논문으로 적잖은 돈을 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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