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과학(뇌과학)과 철학의 만남
저자는 유명한 신경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이다. 이 책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다마지오 3부작 중 한 권이다. 원래 평점을 별 5개을 주고 싶지만 꽤나 난해한 내용 때문에 0.5개를 뺐다. 특히 뇌의 해부학적 구조를 어느 정도 외우는 것도 좋다. 물론 책에 친절히 그림이 실려 있어 독서에 필수는 아니다.
저자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뇌와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며 몸과 마음이 하나임(심신일원론)을 독자에게 설명한다. 신체는 감각을 잃으면 의식이 사라진다. 어쩌면 이 명제는 당연한 공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자를 비롯한 신경과학자들은 뇌의 다양한 병변(알츠하이머 등)을 가진 이들이 갖는 각종 이상 증세를 관찰하고 fMRI 등 최신 과학기술을 통해 뇌의 부위별 기능 지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저자는 원초적 자아, 핵심 자아, 확장 의식(자서전적 자아)로 분류한다. 이는 프로이트(자아-초자아-이드)나 라캉(RSI, 실재-상징-상상)을 연상하게 하지만 큰 연관성은 없다. 저자의 분류는 뇌의 구조에 기반한 설명으로 보다 유물론적이다. 원초적 자아는 비의식적 신경 패턴이고, 핵심 자아는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보이는 비언어적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의식이라고 일컫는 궁극적 실체는 '확장 의식'이다. 이 확장 의식은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자서전적 자아와 (단기 기억을 수행하는) 작업 기억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자에 따르면 확장 의식은 핵심 의식에서 기원한다. 확장 의식이 사라지더라도(예컨대 치매 환자와 같이) 생존할 수 있지만, 핵심 의식 없는 확장 의식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책의 제목에 '느낌(feeling)'이 들어가는 이유는 저자가 느낌이 의식의 시작임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비의식적으로 느끼는 느낌을 의식(메타인지) 하는 것이 바로 의식인 것이다. 저자가 세운 가설은 인간의 고차원적 사고는 결국 비의식적인 정서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무의식을 강조한 프로이트와의 접점이기도 하다.
저자의 연구는 주관적인 정서의 영역을 과학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또한 철학과 과학의 만남이다. 책의 서두에 저자가 경험주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을, 후반부에 심신 일원론을 말한 스피노자를 언급한 것은 어쩌면 필연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유물론적, 기계론적 관점에서 '인간=뇌'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저자도 말했지만 뇌 속에 존재하는 몸을 조종하는 작은 난쟁이 '호문쿨루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신체에서 느끼는 모든 미세한 감각이 우리의 의식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신경과학의 발달로 뇌 지도가 완성되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정서의 경험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chatGPT 같은 인공지능이 존재하더라도 인간과 같을 수 없다고 예견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나는 진화 과정에서 의식이 널리 퍼진 이유가 정서가 일으킨 느낌을 아는 것이 삶을 사는 데 너무나 필수적인 것이었 고, 그렇게 삶을 사는 것이 자연의 역사에서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이 내 설명을 약간 비 틀어 의식이 발명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해도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과학적으로 맞는 말은 아니지 만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이런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나는 처리 과정을 연속되는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눈다. 비의식적으로 촉발되고 실행되는 정서 상태, 비의식적으로 표현되는 느낌 상태, 정서와 느낌 모두를 가진 유기체에게 알려지는 의식적이 된 느낌 상태가 그것이다. 나는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인간에게서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의 신경학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느낌이라는 용어를 사적이고 정신적인 정서 경험이라는 뜻으로, 정서라는 용어는 대부분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반응의 집합이라는 뜻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1) 정서는 화학 반응과 신경 반응의 복잡한 집합이며, 패턴을 형성한다. 모든 정서는 특정한 종류의 조절 역할을 하며, 이 조절은 현상을 나타내는 유기체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방향으로 이끈다. 정서는 유기체의 생명, 구체적으로는 그 유기체의 몸에 관한 것이며, 정서의 역할은 유기체의 생명 유지를 돕는 것이다.(중략)
5) 모든 정서는 몸을 자신의 극장(내부 환경, 장과 전정계, 근골격계)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정서는 수많은 뇌 회로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정서적 반응은 몸과 뇌의 지형 모두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이런 변화는 최종적으로 정서의 느낌이 되는 신경 패턴을 위 한 기질을 구성한다.
핵심 의식은 그대로이지만 확장 의식이 손상된 환자들에 게서 배경 정서와 일차 정서가 놀라울 정도로 손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의식과 정서가 모두 손상된 예를 찾으면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정서와 핵심 의식은 같이 존재하거나 같이 부재함으로써 대개 함께 움직인다.
자아와 의식이 언어가 생긴 후에 생겼으며 언어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언어는 우리가 사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한다. 자아와 의식이 처음부터 언어로부터 생겼다면 자 아와 의식은 그 기초를 이루는 개념이 없이 말로만 존재했을 것이다.
반면 다음 장에서 다루겠지만 시각 또는 청각 같은 하나의 감각 양상 안에서 이미지 생성 능력이 손상되면 대상의 한 측면(시각적 측면이나 청각적 측면)을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능 력만 훼손된다. 하지만 전반적인 핵심 의식은 훼손되지 않으며, 후각이나 촉각 같은 다른 감각 채널을 통해 같은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도 훼손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이미지 생성 능력이 손상되면 의식이 모두 사라진다. 의식은 이미지에 의존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뉴런의 시간 단위는 의식 있는 우리 마음의 시간 단위보다 훨씬 짧기 때문이다. 뉴런이 활성화되어 작동하는 시간은 몇백만 분의 1초 정도에 불과한 반면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가 의식하는 사건 은 이 시간의 수십, 수백, 수천 배의 시간 동안 발생한다. 특 정한 대상에 대한 의식을 '배달'받을 때면 우리 뇌의 장치에 서는 분자 수준에서 보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이미 흐른 상 태다. 분자가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의식은 늘 이렇게 늦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무도 늦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의식 과정을 유발하는 실체에 비해 의식이 늦는다는 생각은 벤저민 리벳의 선 구자적인 실험에 의해 뒷받침된다. 자극이 의식되려면 시간 이 걸린다는 것을 증명한 실험이다. 우리의 의식은 500밀리 초 정도 늦는다. 세포의 시간과 진화가 우리를 여기까지 데 려오는 데 걸린 시간 사이 어딘가에 우리의 정신적 자아가 위 치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또한 우리가 이 두 종류의 시 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제대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도 역 시 신기한 일이다.
이제 흥미로운 증거 하나를 검토해 보자.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에게는 몸이 있다. 이 단순한 관계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관계는 확실하게 존재한다. '하나의 몸, 하나의 개인' 그리고 '하나의 마음, 하나의 몸'. 첫째 원칙이다. 몸이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몸이 두 개이거나 여러 개인 사람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샴 쌍둥이도 이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가끔 두 사람 이상이 사는 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중인격장애라는 질환이다(요즘은 해리성정체 장애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위에서 말한 원칙은 그대로 지켜진다. 주어진 시간에서 보면 여러 개의 인격 중에서 하나의 인격만 몸을 이용해 생각하고 행동하며, 한 사람이 되 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통제권을 가지는 것도 한 번에 한 인격뿐이다(그 인격의 자아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나마 나은 경우다). 다중인격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여겨진다는 사 실은 하나의 몸에는 하나의 자아만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을 반영한다.
원초적 자아는 여러 차원에서 유기체의 물리적 구조의 상태를 매 순간 지도화하는 신경 패턴의 정합적 집합이다.
핵심 의식은 대상을 처리하는 과정에 의해 유기체 자체의 상태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이미지화 된 비언어적인 설명을 뇌의 표상 장치가 만들어 내고, 원인이 되는 대상의 이미지가 이 과정에 의해 강화되어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상황에 두드러지게 배치될 때 발생한다.
실제로 의식의 언어적 이야기의 내용이 그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일관적이라면 내가 의식의 기초라고 생각하는, 같은 정도로 일관적인 이미지화된 비언어적 이야기가 존 재할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철학에는 이른바 '지향성 intentionality'에 관한 난해한 문제가 있다. 마음속 내용은 마음 밖의 사물에 '관한' 것이라는 흥미 로운 개념이다. 나는 마음에 퍼져 있는 '관함aboutness'이 이야 기를 하는 뇌의 태도에 기초한다고 생각한다. 뇌는 생래적으로 유기체의 구조와 상태를 표상하며, 자신의 역할에 따라 유 기체를 조절하면서, 환경 속에 잠겨 있는 유기체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해 말없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다.
모든 핵심 의식은 확장 의식이다. 단지 더 크고 더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만 다르다. 확장 의식은 진화 과정과 개인의 일 생에 거쳐 계속 더 커진다. 핵심 의식이 날아가는 새를 보거 나 고통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 당신이라는 것을 잠시 동안 알 게 해 준다면, 확장 의식은 이런 경험을 더 넓은 캔버스에 더 오랜 시간 동안 배치한다. 확장 의식 역시 동일한 핵심적 '당신'에 의존하지만, 그 '당신'은 자서전적 기록의 일부인, 당신 이 살아온 과거와 예상되는 미래다. 단순히 당신에게 고통이 있다는 사실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위치(팔꿈 치), 고통의 원인(테니스), 고통을 마지막으로 겪은 시점(3년 전? 4년 전?),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매기 고모), 고모가 찾 아간 의사(메이 박사? 니콜스 박사?)와 관련된 사실, 내일 잭 하고 놀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당신은 같이 떠올리게 된다. 확장 의식이 현재의 당신에게 접근을 허용하는 지식은 광대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이 광대한 풍경을 보는 자아는 진 정한 의미에서 튼튼하다고 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자아가 바로 자서전적 자아다.
가장 신기한 것은 발생의 순서다. 개별 유기체의 비의식적 인 신경 신호 전달이 원초적 자아를 낳고, 원초적 자아는 핵심 자아와 핵심 의식을 낳는다. 핵심 자아와 핵심 의식은 자서전 적 자아를 낳고, 자서전적 자아는 확장 의식을 낳는다. 이 사슬의 끝에서 확장 의식은 양심을 낳는다.
의식 과정 없이도 수많은 생명 조절이 이루어지며, 자아를 아는 것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기능이 자동화될 수 있고 호불 호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의식의 진정한 쓰임 새는 어디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답은 이렇다. 의식은 마음의 범위를 넓히고, 그로 인해 더 넓은 범위의 마음을 가지게 된 유기체의 생명을 더 좋은 상태로 만든다.
의식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항상성 유지를 위한 새로 운 수단을 도입한다는 데 있다. 이 수단은 뇌간과 시상하부에서 오랫동안 자리해 온 완전히 비의식적인 장치보다 더 효율적인 내부 환경 조절 장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전부터 존재하는 항상성 조절 수단에 의해 해결되는 문제와 연결된 다른 종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뇌간과 시상하부의 장치는 비의식적으로 그리고 매우 효율적으로 심장, 폐, 신장, 내분비계, 면역계를 조 정해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적절한 범위 안에서 유지 되도록 만드는 반면 의식 장치는 개별 유기체가 유기체의 기본 설계에서는 예상되지 않았던 환경의 위협 요소에 대처함으로써 생존에 핵심적인 조건이 충족되도록 만든다.
나는 현재 상태로 설계된 의식이 상상의 세계를 개인, 개 별 유기체, 넓은 의미에서의 자아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로 만 든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의식의 유효성이 비의식적인 원초적 자아와의 끊임없는 연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연 결은 걱정을 만들어 냄으로써 개인 생명의 문제에 적절한 주 의를 기울이도록 만든다. 의식의 유효성이 지닌 비밀은 아마 도 자신인 상태selfness에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의식의 힘은 개인의 생명 조절을 위한 생물학적 장치와 생각을 위한 생물 학적 장치 사이의 효과적인 연결에서 나온다. 이 연결은 생각 과정의 모든 측면에 스미고, 모든 문제 해결 활동을 집중시키며, 그에 따른 해결 방법을 만들어 내는, 개인의 걱정을 만들어 내는 기초다. 의식이 가치 있는 이유는 개별 유기체의 생명에 지식을 집중시키는 데 있다.
주관적인 경험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주관적인 실체도 객관적인 실체처럼 충분한 수의 관찰자들이 동일한 실험 설계에 따라 철저한 관찰을 수행해 야 한다. 또한 이런 관찰 결과는 관찰자들 전체에서 일관성을 가지는지 검증해야 하며, 특정한 형태의 수치를 내야 한다. 게다가 주관적인 관찰로부터 얻은 지식, 예를 들어 내적인 통 찰 같은 것은 객관적인 실험에 영감을 줄 수 있으며,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주관적인 경험이 현재의 과학적 지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주관적인 경험의 속성을 그 행동적 상관물을 연구해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마음과 행동은 둘 다 생물학적 현상이지만, 마음은 마음이고 행동은 행동이다. 마음과 행동은 연관되어 있고 이 관계는 과학의 진보에 따라 더 밀접해지겠지만, 각각의 세부 사항 면에 서는 서로 다르다. 당신이 내게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당신의 생각을 결코 알 수 없으며, 내가 당신에게 말을 하기 전까 지는 당신은 내 생각을 결코 알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식의 메커니즘 형태를 갖춘 인공물의 외부적 행동 일부는 의식적인 행동과 비슷할 것이고, 튜링 테스트의 의식 버 전을 통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 마음, 튜링 테스 트 문제에 관한 존 설과 콜린 맥긴의 훌륭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다고 해서 인공물에 마음이 있다고 확신하기는 힘들다. 더 중요한 것은 인공물의 내부 상태를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한 신경적, 정신적 설계의 일부와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내부 상태가 이차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질 수 있다고 해도 느낌의 비언 어적 어휘의 도움이 없다면 그 지식은 인간에게서 또는 의식 이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종들에게서 관찰되는 방식으로는 표 현되지 않을 것이다. 느낌은 실제로 장벽이다. 인간에게서 의 식이 나타나려면 느낌이 존재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서의 '겉모습'은 모방할 수 있지만, 느낌이 느껴지는 방식은 실 리콘으로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 느낌은 육체가 복사되지 않 는 한, 육체에 대한 뇌의 작용이 복사되지 않는 한, 뇌가 육체에 작용한 후 뇌가 그 육체를 감각하는 과정이 복사되지 않는 한 복사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