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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Oct 23. 2024

인간이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흄


근대철학에 있어 가장 큰 영광을 누린 철학자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인 임마누엘 칸트이다. 하지만 그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상을 통합한 철학은 데이비드 흄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왔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저자는 20대의 나이에 철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본인 스스로 비견한)를 일으키는 책을 저술했다. 


이 야심만만 한 책은 '회의주의'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흄의 회의주의는 '누구도 알 수 없다.'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기에 철학사적으로 그리고 과학사적으로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의 이론이 다른 사실의 발견으로 기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과학적 사고지만 그의 철학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의 경험주의 역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주의를 따른 것이다(철학이 어려운 점은 저자가 영향받은 사상적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가 데카르트와 가장 큰 차이점은 회의주의의 마지막에 신(神)을 집어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원인의 원인에 대해 손쉽게 이를 주관하는 신(神)이 있다고 결론 맺지 않는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합리주의 철학 전통에 따른 본유관념, 즉 주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이를테면 신(神)과 수학의 공리 같은 것 말이다. 저자는 기하학의 불완전성, 수학의 무한 개념을 공격하기도 한다. 


저자는 1편 <오성>에서 인간 정신이 인상과 관념의 두 종류라고 한다. 이러한 정신의 구분은 현대 신경과학에서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무의식적 자아와 의식적 자아를 나누는 방법론과 매우 유사하다. 오히려 신경과학자가 그의 사상에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인간이란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

2편 <이성>에서 저자는 이성을 정념의 노예라고까지 표현한다. 즉, 이성이 고대 철학에서부터 누려온 높은 지위를 끌어내린다.  즉, 우리의 이성적 사고는 결국 정념이라는 욕망에 의해 이루어진다. 스피노자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제3편 <도덕>에서 저자는 사변철학과 실천철학을 구분한다. 도덕은 실천철학이다. 훗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구분하여 저술한 것은 저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개인의 도덕감정은 공리가 아니라 개인적 공감에 있다고 말한다. 윤리학은 이제 철학에서 떨어져 나가 향후 심리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한편, 저자는 홉스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을 발전시켜 권력자에 대항하는 시민 불복종을 끌어낸다. 그는 국가의 존재가 인간의 이익 때문인데, 압제자가 저버리면 더 이상 피지배자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분량이 방대하고 번역어라 읽기 힘들었지만 읽고 나니 읽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를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라는 또 다른 큰 산을 등정해야 할 차례가 된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제1편 오성)



인간 정신에 나타나는 모든 지각2)은 결국 서로 다른 두 종류로 되돌아갈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인상’3)과 ‘관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상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다.4) 최고의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에 우리는 ‘인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때 감각,5) 정념 그리고 정감6) 등이 우리의 영혼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선 이것들을 모두 인상이라는 이름에 포함시킨다. 또한 나는 ‘관념’이라는 말로, 사고 및 추리에 쓰이는 이들 감각‧정념‧정감의 흐릿한 반영을 나타내고자 한다. 예컨대 그것은 이 논고를 통해 불러 일으키는 지각 가운데 시각 및 촉각에서 비롯되는 약간의 것을 제외하고, 또 직접 야기되는 쾌감이니 불쾌감이니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각을 뜻한다. 



우리는 어떤 인상이 정신에 나타났을 때, 그 인상이 다시 관념으로서 정신에 현상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발견한다. 여기서 그 인상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그 인상이 새로 현상할 때 맨 처음 생동성을 꽤 대단하게 유지하는 경우로, 그것은 인상과 관념 사이의 어떤 중간자이다. 둘째, 그 인상이 생동성을 오롯이 잃어버릴 경우로, 그것은 완전 관념이다. 우리가 인상을 첫째와 같이 되풀이하는 기능을 기억이라고 하며, 둘째와 같이 되풀이하는 기능을 상상이라고 한다. 기억 관념이 상상 관념보다 훨씬 생기 있고 세차며, 기억 기능은 상상 기능이 그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확실한 색으로 대상을 그려 낸다는 것은 첫눈에도 분명하다. 



이러한 연합을 일으키고, 또 정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질에는 세 종류가 있다. 바로 비슷함, 시간이나 장소의 이웃함, 원인과 결과이다. 



진정한 철학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원인에 대하여 탐구하려는 지나친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는 일, 또한 충분한 실험에 의해 어떤 이론을 세우고 나서 더 이상의 연구가 그를 아리송하고 불분명한 사변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수준에서 만족하는 것 등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마도 그가 자기 원리의 원인보다는 그 결론을 다시 살펴보는 데 열중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1) ‘양태(mode)’는 사물 또는 실체의 비본질적 성질을 말한다. 스콜라 철학으로 시작해서 데카르트가 말하고, 대륙의 합리론 형이상학이 일반적으로 계승한 개념이다. 이것에 대해 ‘속성(attribute)’을 생각할 수 있지만, 흄은 이것을 말하지 않았다.


  2) ‘실체(substance)’는 변혁하는 현상의 기초로서, 다양한 현상은 그 변이라고 생각되는 항상적이고 자기 동일적인 것을 말한다. 이런 뜻의 실체는 스콜라 철학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 및 그 이후 대륙철학에서 사용되었다. 



시간의 각 부분들이 이어져 어느 정도 이웃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에서 나눌 수 없는 속성이며, 이 속성이 이른바 시간의 본질을 이룬다. 1737년은 1738년인 올해와 한 시기일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순간마다 서로 독립적이며, 다른 어떤 순간보다 뒤이거나 앞이다. 따라서 시간은 자신이 존재하는 한 불가분적 순간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에서 우리가 궁극적인 분할에 이를 수 없다면, 바꿔 말해 각 순간들이 서로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단일적이지 않고 불가분적이지도 않다면, 터무니없는 모순으로 간주되리라 생각되는 한없는 공존적 순간 또는 시간의 부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동 본성으로 미루어 확실하듯이 공간의 한없는 분할 가능성은 시간의 끝없는 분할 가능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시간이 끝없이 나뉠 수 없다면, 공간 또한 그럴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장 관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의식하는 것처럼 그 관념이 사실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 부분들 또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 부분들은 색깔이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간 관념 즉 연장 관념을 시각이나 촉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관념을 가질 수 없다. 



제1부 제4절에서 내가 그 원인을 검토해 보지도 않고 유사, 인접, 인과 등의 관계를 관념들 사이의 통일 원리로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내가 이 주제 위에 늘어 놓을 수 있는 허울 좋고 그럴싸한 그 무엇이 없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우리가 결국 경험에 만족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나의 첫 원칙에 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라는 관념 요소를 이루는 필연적 연관의 본성에 관한 이 문제를 직접 살펴보려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암시를 줄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을 찾아 탐구하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이 의문들 가운데 내가 살펴보려는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존재의 발단을 갖는 모든 것들이 필연적으로 각각 하나의 원인을 갖는다고 선언하는가? 


  둘째, 우리는 왜 개별 원인이 필연적으로 개별 결과를 가져야 한다고 결론짓는가? 그리고 우리가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이끌어 내는 추정의 본성은 무엇이며, 또 이 추정에서 우리가 의지하는 신념의 본성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원인이 결과라는 바로 그 관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결과는 저마다 하나의 원인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어리석다. 물론 모든 결과는 저마다 필연적으로 하나의 원인을 전제한다. 결과는 원인이 상관하는 관계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이, 모든 존재에는 반드시 원인이 앞선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모든 남편들에게 아내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모든 남성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문제 실상은 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대상들이 항상 원인에 의해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직관적이든 논증적이든 간에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지금까지 논증으로 충분히 확인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생각건대 감관에서 비롯되는 인상들의 마지막 원인은 인간 이성으로는 완전히 밝혀낼 수 없으며,2) 그 인상이 대상으로부터 직접 비롯되는지 또는 정신의 창조력에 의해 생겨나는지 또는 우리의 조물주로부터 비롯되는지를 확실하게 결정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 목적에 비춰 볼 때 그런 물음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지각들이 참인가 거짓인가, 다시 말해 그 지각들이 자연의 정확한 재현인가 아니면 감관의 눈속임일 뿐인가라는 것 따위에 대하여 우리는 지각들의 정합성에서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관찰에서 나는 신념이 현재 인상에 뒤따르며, 지난날 수많은 인상들과 인상 간의 관련에 의해 생겨난다는 결론을 내린다. 거듭 말하자면 이 신념은 이성이나 상상력의 새로운 작용도 없이 직접 발생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작용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주장에서 어떤 작용도 의식할 수가 없고, 이러한 작용의 근거가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결론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단순히 과거의 반복에서 나타나는 습관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새로운 추론이나 결론 없이도 현재 인상에 따라 나타나는 신념은 모두 오직 습관이라는 기원에서만 비롯된다는 것을 분명한 진리로 확정지을 수 있다. 우리가 서로 결합된 두 인상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을 때, 한 인상의 출현 또는 그 인상의 관념은 우리를 다른 인상의 관념으로 직접 데려다 준다. 



모든 정신 작용들을 발원시키고 움직이는 주된 원리는 무엇일까. 고통과 쾌락의 지각이다. 그 두 가지가 인간 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 



비록 철학자들은 부정하지만 그 차이가 생기지 않을 수는 없다. 기억에 생생한 최근 실험(실지 경험)은 어느 정도 어렴풋한 실험보다도 우리에게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습관의 이런 결과에서 발생하는 판단력과 상상력의 대립에서 (비)철학적 개연성4)이라는 지금의 주제가 매우 분명한 사례를 제공해 주는데도 다른 사례를 찾아볼 이유가 있을까? 나의 학문 체계에 따르면 모든 (인과적) 추론은 습관의 결과일 뿐이다. 습관은 상상력을 복돋우고 어떤 대상에 관한 생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영향력이 전무하다.


  그러므로 판단력과 상상력은 결코 상반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이 두 기능에 대한 습관의 작용은 결코 두 기능을 대립시킬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필연성 관념은 어떤 인상에서 발생한다. 감관으로 전달되는 인상은 이 관념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필연성의 관념은 어떤 내부 인상이나 반성 인상에서 유래해야 한다. 어떤 대상에서 그 대상에 언제나 수반되는 것의 관념으로 옮겨 가는 성향은 습관이 산출한다. 그런데 이 성향을 제외하고는 현재 우리의 관심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내부 인상은 없다. 그러므로 이 성향이 필연성의 본질이다. 요컨대 필연성은 대상이 아니라 정신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대상들은 서로 원인이나 결과가 될 수 있으므로, 이 대상들이 실제로 그러한 때를 우리가 알 수 있는 일반 규칙을 몇 개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


  1. 원인과 결과는 반드시 공간과 시간에 인접해 있다.


  2. 원인은 반드시 결과보다 앞선다.


  3.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반드시 항상적 합일이 있다. 주로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성질이다.


  4. 동일한 원인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고, 동일한 결과는 동일한 원인을 제외한 어디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자신의 학문에 정통한 대수학자나 수학자라 하더라도 어떤 진리를 발견하자마자 곧 그 진리를 완전히 믿거나, 그 진리를 단순한 개연적 지식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의 확신은, 그가 자신의 증거들을 훑어볼 때마다 커지며, 친구의 동조에 따라 더욱 커지고, 학계의 보편적 동의와 찬사를 받음으로써 가장 완전한 수준으로 올라간다. 확신이 이처럼 점진적으로 커지는 것은 새로운 개연성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증가는 지난날 경험과 관찰에 따른 원인과 결과의 항상적 합일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가정했을 때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절대 지식과 개연적 지식의 엄밀한 경계를 실제로 보여 주거나, 절대 지식이 끝나고 개연적 지식이 시작되는 특정한 분기점을 발견하기란 실제로 어렵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경향이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인간 본성이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정서를 외부 대상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자신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그와 같은 정서의 관념들을 어디서나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형이상학자들은 제쳐놓더라도, 나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감히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인간이란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일 뿐이다. 


‘a bundle or collection of different perceptions, which succeed each other with an inconceivable rapidity, and are in a perpetual flux and movement.’




인상 깊은 구절(제2편 정념)



정념은 다시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직접 정념은 선악 그리고 고통과 쾌락으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이다. 간접 정념은 같은 원리에서 유래하지만 다른 요소와 결부되어 발생한다. 나는 지금으로선 이 구별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내가 보는 간접 정념이란 긍지‧소심‧야망‧허영심‧사랑‧미움‧질투‧연민‧심술‧관용 등과 함께 이것들에 의존하는 정서를 포함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 정념에는 욕구‧혐오‧비탄‧기쁨‧희망‧두려움‧절망‧안도 등이 있다. 먼저 간접 정념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긍지와 소심이 비록 직접적으로 상반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은 명백하게 동일하다. 이 대상은 자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의식하는 서로 관련된 관념들 및 인상들의 계기이다. 



내가 긍지와 소심에서 발견한 정신의 근원적 성질이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성질은, 정념이 영혼에 불러일으키며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구성하는 그 정념의 감각 또는 특유의 정서이다. 예를 들면 긍지는 유쾌한 감각이며 소심은 고통스러운 감각이다. 이러한 고통과 쾌락을 제거하면 실제로 긍지나 소심은 없다. 우리는 실제 느낌으로 이것을 확신하며, 우리의 느낌을 벗어나면 추리와 논쟁이 모두 무의미해진다. 



긍지가 가장 강한 사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긍지를 가질 만한 사람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며, 가장 소심한 사람이 가장 불쌍한 것도 아니다. 어떤 악은 그 원인이 우리와 무관하더라도 실재할 수 있다. 특이하지 않아도 실재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아도 실재할 수 있으며, 지속적이지 않아도 실재할 수 있다. 악은 일반 규칙을 따르지 않고도 실재할 수 있다. 이런 악이 긍지를 감소시키는 경향은 거의 없지만,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 수는 있다. 우리는 삶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가장 철저한 악은 이런 본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사랑과 미움은 언제나 우리 외부의 감정적 존재를 지향한다. 우리가 자기애4)에 대해 말할 때 그것에는 정확한 의미가 없다. 바꿔 말하면 자기애는 친구나 연인을 통해 느끼는 정겨운 정서와 공통적인 어떤 것도 산출하지 않는다. 미움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이나 어리석음 때문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모욕을 가하지 않는다면 결코 분노와 미움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은 전 우주의 생물들 가운데 사회에 대해 가장 열렬한 욕망을 가지며, 이익을 얻기 위한 점에서부터 사회에 적응한다. 우리는 사회와 무관한 희망을 결코 품을 수 없다. 아마 완전한 고립이야말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최대의 형벌일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인간의 각 정신이 서로의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11) 인간의 정신이 서로의 정서를 반영해서만은 아니다. 흔히 정념과 소감 그리고 의견이라는 광선이 굴절되어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소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상을 내재적 가치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른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한 견해를 형성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행복이나 불행의 크고 작은 정도를 관찰함에 따라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을 평가하고 최종적인 고통이나 쾌락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변화하는 데에는, 그리고 극심한 고통과 노력을 대가로 치르며 마련한 것을 번복하는 데에는 한 시간만 있으면, 아니 한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대체로 필연성은 규칙적이고 확실하다. 인간의 행동은 불규칙적이고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필연성은 인간의 행동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완전히 헛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변덕스럽고 불규칙적인 모든 행동을 실행할 수도 있다지만, 우리의 자유를 명시하려는 욕구야말로 우리 행동의 유일한 동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필연성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내면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찰자는 외부에서 우리의 동기나 성격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철학 전체의 허위를 명시하기 위해 내가 증명하려고 노력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직 이성만으로는 어떤 의지 활동의 동기도 될 수 없다. 둘째, 이성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할 때 결코 정념과 상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정념과 이성의 싸움을 말할 때, 우리는 엄밀하고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또 노예여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정념이란 선이나 악이 현존하거나 어떤 대상이 우리 직능의 근원적 형식을 통해 우리의 욕망을 유발시키기에 적합할 때, 정신에서 일어나는 격렬하고 감지할 수 있는 정서이다.9) 다음으로 우리가 뜻하는 이성은 전자와 같은 종류의 감정들이지만, 더욱 차분히 작용하며 기분에 어떤 혼란도 유발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침착성 때문에 우리는 이런 감정을 오해하게 되고, 오직 우리 지성적 직능의 순수한 논리적 직능으로 간주한다. 이 격렬한 정념과 차분한 정념 따위의 원인과 그 결과는 매우 다양하며, 대개 각 개인 고유의 기분과 성향에 의존한다. 




인상 깊은 구절(제3편 도덕)



철학은 보통 사변 철학과 실천 철학으로 나뉜다. 그리고 도덕성은 언제나 실천 철학에 포함되므로, 우리는 도덕성이 우리 정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오성의 차분하고 냉정한 판단을 넘어서는 것으로 가정한다. 



언뜻 보기에, 자연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 가운데 인간에 대해 가장 가혹한 것 같다. 자연은 인간에게 숱한 욕망과 필요를 떠맡겼으며, 이런 필요에서 빠져 나오도록 자연이 인간에게 준 수단은 매우 빈약하다. 



즉 인간이 꽤 오랜 시간을 사회화 이전의 야만적 상태로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며, 인간의 최초 상태와 상황을 사회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언제나 인간은 미래보다 현재의 삶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인간은 미래의 것으로 여겨지는 가장 큰 악보다는 현재의 것으로 여겨지는 가장 작은 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므로 유일한 어려움은 인간의 자연적 허약함을 치료하는 방법, 즉 가까운 것을 먼 것보다 선호하는 인간의 강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정의 법칙을 지키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법적 성향을 바로잡지 않고는 그와 같은 해결 방안도 결코 효과가 없다. 또한 우리 본성의 실질적인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바로잡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주변의 여건과 상황을 변화시켜, 정의의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익이 되도록 하는 동시에, 정의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 우리와 가장 거리가 먼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익을 정치적 사회에서 누릴 수 있으며, 우리가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일 때에는 결코 이런 이익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런데 이익은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재가이므로, 이익이 없는 곳에는 정부도 있을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행정관이 그 권위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우리 피지배자를 압제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러한 권위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 또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이 확신할 수 있듯이, 일반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것과, 일부 사람들이 아주 높게 평가한 특정 인물과 가족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은 이성에서 유래된 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편향된 믿음과 미신적 관습에서 유래된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분별력과 가치를 갖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스스로에게 만족한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신체적 역량과 지성에 대해 만족하고 자랑하기 위해 늘 자기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책이 윤리학 체계를 정확하게 증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기를 바란다. 분명히 말하지만, 공감은 아주 강력한 인간 본성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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