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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Nov 13. 2024

설탕, 윌버 보스마

공정무역의 기원은 노예설탕에서 시작한다.


책의 원제는 세상의 설탕(The World of Sugar)이다. 국내 번역판 제목이 설탕이다 보니 다소 가벼운 주제로 오해할 수 있는데(실제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설탕을 둘러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문제, 노예제도와 대기업, 보호무역과 관세, 빈곤과 비만 문제 등 매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나면 글로벌 사우스(개발도상국)*에 대한 개념을 추상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보다 실체적으로 정립할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 : 1969년부터 국제사회에서 사용된 용어로, 주로 개도국들이 선진국에 대응하기 위해 단합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글로벌 사우스에는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남아메리카 및 아프리카 전체, 한국, 일본, 이스라엘을 제외한 아시아, 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한 오세아니아가 포함된다. - 나무위키


설탕의 역사는 2,500년을 헤아린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의 대부분은 대항해시대(15~16세기) 이후 서구 유럽이 식민지를 조성하면서 서인도제도와 동인도 제도에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역사이다. 사실 이 용어 자체가 유럽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용어이며 현재는 이러한 의미로 주로 한정해서 쓰인다.


서인도 : 카리브해(아메리카 대륙 동부) 일대 식민지
동인도 : 동남아시아 일대 식민지


우리는 노예제에 대한 이미지를 아프리카에서 북미 대륙으로 끌려가 목화밭에서 농사를 짓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노예제는 그보다 훨씬 앞서 서인도, 즉 카리브해 식민지와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대륙 등지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이들을 착취한 대가로 근대문명은 싹텄고 융성했다.  


그리고 초기 사탕수수 농사는 목화밭보다 훨씬 위험하고 고된 작업이었다. 노예들은 자살과 반란으로 저항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예제는 수백 년에 걸쳐 유지되었고 노예제 폐지 후에는 노예에 가까운 계절노동자, 임시 노동자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서인도와 동인도 각국에 식민지를 뒀던 네덜란드 출신으로 노예제를 연구한 역사가이다. 이러한 이유로 식민지 시대 기록이 풍부하였을 것이다. 한때 피식민지를 겪었던 후손으로서, 하와이에 7천 명의 조상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했던 처지라서 그런지 백인 노예 감독관의 후예가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을 쓴 것 같아 꽤 아이러니하다.


설탕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노예들은 기계화로 대체되고, 설탕은 공정기술의 발전과 사탕수수 품종개량을 통해 과잉 생산된다. 각국의 보호무역 아래 설탕은 보복적 관세 부과와 덤핑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부르주아인 설탕 제조업자가 아니라 지난날 노예를 대체한 사탕수수 농민들이다. 끊임없는 설탕 가격의 하락은 이들의 노임 단가를 계속 낮추지만 작업환경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한편 (서인도와 동인도 사이에 있는) 인도의 설탕 문화는 영국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구르(비정제 설탕)와 같은 고유의 설탕 문화를 유지하여 현재까지 설탕 소비대국으로 남아있다. 



설탕은 20세기에 이르러 인공 감미료가 개발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음료에 저가의 액상과당이 들어가면서 설탕이 대체된다. 사실 오늘날 (칼로리) 제로 음료 열풍은 아스파탐 같은 인공 감미료를 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있어 저자는 인공 감미료를 설탕의 대체재로 약간 옹호하는 듯하다. 



21세기 화두는 비만이다. 저자는 설탕협회의 로비로 인해 비만의 원인으로 지방이 부각되고 설탕은 빠졌다고  지적한다. 설탕은 음식에 부패 방지 기능과 고열량이 주는 포만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기능성 때문에 모든 음식에 설탕이 남용되고 있다. 저자는 법 제정을 통해 설탕을 통제해야 한다고 무거운 책의 마지막에 결론 내린다.



실제로 20세기에 가난한 노동자들은 굶주리지 않았다. 

그들은 한 세대 안에 영양 부족에서 칼로리 과다로 이행했다.

설탕, 윌버 보스마





인상 깊은 구절



현재 서유럽인이 소비하는 설탕과 감미료는 1인당 연평균 40킬로그램이다. 북아메리카에서는 60킬로그램에 육박한다. 전 세계가 유럽인이 소비하는 것과 동 일한 양의 설탕을 소비한다고 치면, 전 세계의 설탕 생산은 현재의 1억 8000만 톤에서 3억 800만 톤으로 늘어야 할 것이다. 단위 면적당 생산 성은 거의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수요를 충족하려면 설탕이 땅을 마구 잡아먹을 것이다. 이른바 바이오 연료라며 에탄올을 생산하려 고 점점 더 많은 땅을 사탕수수 재배에 쓰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1401년, 티무르의 튀르크-몽골 군대가 요르단강 유 역을 휩쓸고 이어 대도시 다마스쿠스 Damascus를 파괴했다. 한편 기후 변 화로 가뭄이 더 잦아졌고, 거듭 재발한 전염병으로 농산물의 소출이 급 감했다. 맘루크 제국 술탄들이 풍비박산된 세입을 설탕을 포함한 여러 사업을 독점하여 강화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독립적인 설탕 상 인들과 생산자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활력 넘치던 설탕 부르주아지는 그렇게 사라졌다. 18 한때 번성했던 중동의 설탕 경제는 무너졌고, 16세 기에 이집트의 설탕 생산이 다시 회복되기는 했으나 중동과 기독교 세 계 사이의 설탕 무역은 종결되었다. 


흑사병과 티무르의 침공이 초래한 파괴는 유럽을 아시아의 설탕 경 제에서 분리시켰기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톨릭교회는 아메리카에서도 가톨릭 군주들에 게 노예가 된 신민의 세례를 도우라고 요구함으로써 플랜테이션 자본 주의 체제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의 비인격화를 지속적으로 역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의 영혼을 돌볼 의무 가 전혀 없었다. 당시 유럽이 매우 종교적인 사회였음을 감안할 때 이 새로운 자본주의적 노예제의 철저한 비인간화 성격은 충격적이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주로 향한 곳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살아남은 약 1250만 명 중 적어도 절반에서 3분의 2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들어갔다. 49 유럽에서 설탕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했기에 노예선은 노예 수 요를 맞출 수 없었다. 이는 특히 18세기 말 생도맹그의 설탕 생산이 절 정에 달했을 때 해당하는 말이다. 그때 프랑스의 노예상들은 포로들을 구매하려고 끊임없이 배를 타고 아프리카 동해안으로 갔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 (1814)와 샬럿 브론 테의 소설 《제인 에어 Jane Eyre) (1847)는 영국의 지배 계급이 서인도 제도 경제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 서인도 제도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이 어떻게 영국 지배 계급의 일부가 되어 왕실까지 침투했는지를 문학으로 보여준다. 제6대 헤어우드 백작인 헨리 래설스는 영국 왕 조지 5세의 딸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BBC(영국방송공사)의 인기 연속극 <다운튼 애비 Downton Abbey>(2010~2015)를 바탕으로 2019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 화는 헤어우드 성에서 일부를 촬영했지만, 관객에게 그 성의 돌 하나하 나가 노예의 노동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값을 지불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는다. 



러시가 쓴 책과 같은 소책자들은 상업적으로 연결된 필라델피아와 런 던의 퀘이커교도를 통해 빠르게 대서양 건너편으로 전해졌고, 1780년 대에 노예제 폐지 운동이 영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중 운동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퀘이커교도는 1783년에 의회에 청원을 시작했고, 이를 실태 조사와 애덤 스미스 경제학에 기반한 보편적 운동으로 확대했다. 어쨌거나 애덤 스미스는 이미 농업 부문의 강제 노동을 후진적이라며 거부했고, 비록 설득력은 떨어졌지만 이러한 시각에 흑인 노예제를 포함시켰다. 134 노예가 생산한 설탕의 소비에 항의하는 것은 진정한 대중 운동이 되었다. '인간의 피로 얼룩진' 설탕의 소비를 비난한 윌리엄 폭 스가 1791년에 발표한 소책자는 총 25쇄, 5만 부를 찍었다. 해적판까 지 포함하면 거의 25만 부 가까이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메시지는 명쾌하고 간단하다. "만일 그 상품을 구매하면 우리는 범죄에 가담하는 것이다. "



한편 프랑스의 설탕 식민지에서는 교육을 더 잘 받은 새 세대 설탕 생 산자들이 식민 모국의 기술자들의 지원을 받아 공장의 기술적 수준을 빠르게 높였다. 결정권을 쥐고 지휘한 이 기술자들은 대부분 카유에 콩파니와 관련된 이들이었는데, 그 회사는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의 크리오요 가문이 운영하는 개선된 공장에 자사 기계를 설치하는 자금을 종종 공동으로 출자했다. 웨첼 팬은 폐기되었고, 진공 팬을 설치한 중앙공장들이 출현하여 인근 농장들에서 사탕수수를 가져왔다. 프랑스인 평자들은 이러한 중앙공장이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소농과 대농에게 공히 최신 산업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농업 관계를 민주화했다고 주장했다. 58 과연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변화는 불가분의 관계로 얽혔다.



영국이 노예무역을 금지한 후, 영국령 서인도 제도와 네덜란드령 서인 도 제도, 그리고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에서는 노예가 처한 조건을 개 선하기 위한 규제가 시행되었다. '개선'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정책으로 자본주의적 노예제 최악의 비인간적 측면이 완화되었다. 노예를 인 간으로 보는 인식이 핵심 요소였다. 그렇게 되면 사춘기 이전의 자녀가 있는 가족을 서로 떼어놓는 것은 당연히 금지된다. 개선은 또 노예가 된 사람을 법정의 증인으로 인정했고 그들의 재산 소유도 허용했다. 다른 결정적 변화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종교 의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의 플랜테이션 농장은 대부분 18세기 말까지 성 직자의 접근을 금했다.



크로퍼와 매콜리, 헤이리은 순수하게 도덕적인 싸움을 경제적인 싸 움이자 진실에 관한 싸움으로 바꿔놓았다. 노예제 반대협회의 글에서 '완화'와 '점진적'이라는 낱말이 사라졌다. 1830년대 초에 도합 40만 명의 여성과 90만 명의 남성이 서명한 약 5000건의 청원이 의회를 습 격했다. 영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발행 부수가 계속 증가하는 신문이 이 운동을 지속시켰다. 조사이어 웨지우드 같은 퀘이커교도 기업가들은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였는데, 그들의 공장에서 "동인도 제도 설탕은 노예가 만들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설탕 용기가 만들어져서 영 국 가정에 들어갔다. 


영국의 상황 전개에 용기를 얻은 노예들은 스스로 해방을 쟁취하고 자 했다. 영국 의회의 노예 해방에 관한 토의가 지지부진하게 끝났다는 소식은 흑인 자유인 거주자들을 통해 플랜테이션 농장 지역에까지 퍼 졌을 것이다. 1831년 크리스마스에 자메이카에서 대대적인 폭동이 발 생하여 열하루 동안 지속되었다. 약 3만 명의 노예가 참여했으며, 많은 플랜테이션 농장과 농장주의 저택이 불탔다. 역사서에 '침례파 전쟁' 이나 '크리스마스 반란'으로 기록된 이 폭동은 200명의 사상자와 노예 500명의 집단 처형을 초래한 뒤에 진압되었다.



노예제 옹호자들은 이 같은 제한적 개선을 거론하며 미국 남부 주들의 노예가 산업 노동자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지낸다고 주장했다. 미국 북부 도시 노동자들의 물질적 조건이 확실히 더 나빴을 수도 있지만, 노예가 당한 학대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문과 신체 절단, 노예를 물어뜯는 블러드하운드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은 수없이 많다. 턴불이 쿠바에서 보고 묘사한 것과 같은 채찍질 도구는 루이지애나에도 있었다. 60 남북전쟁 이전 루이지애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에 나오듯이, 플랜테이션 농장의 조건을 낭만적으로 그리면 미국 노예제 연구의 선구자인 허버트 앱시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노예제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 상태였으며, 흑인 아닌 자는 전부 법에 따라 압제자의 상비군에 속했다. "61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제는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데일 토미치가 말한 이른바 '두 번째 노예제' 시기에 약간 늘어났다. 19세기 중반 약 80만 명의 노예가 사탕수수 밭에서 고된 노동을 했는데, 그 절반이 쿠바에 있었고 약 3분의 1은 브라질에 있었다.” 1864년 루이지애나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전 세계 사 탕수수 설탕 수출량의 거의 절반이 여전히 노예 노동으로 생산되었다. 그 수출량의 4분의 1은 노예살이 계약 노동자가 생산했다. 다양한 형 태의 노예제와 강제 노동이 종종 거의 노골적으로 지속되었다. 예를 들 면 레위니옹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노동자를 구매하여 앙가제로 신분을 '세탁'할 수 있었다. 영국 당국은 이러한 관행을 격하게 비난했지만 소용없었다.” 자와의 강제 재배 제도는 1860년대 이후로 서서히 사라졌으나, 앞에서 보았듯이 대다수 자와 농민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촌 락 유지들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공장에 공급할 사탕수수를 재배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하와이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심지어 오래된 선교원 네트워 크까지 이용하여 조선의 기독교도 7000명을 고용하기도 했다. 당시 조 선의 법에 따르면 이는 불법적 활동이었다.



중앙공장이 우위를 점하면서 사탕수수 밭과 설탕 공장은 점차 별개의 세계가 되었고, 여기에 인종 구분의 강화가 동반되었다. 사탕수수 밭과 설탕 공장은 사실상 세계적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던 현상의 축소판 현 장이었다. 유럽인의 대량 이주, 아프리카와 아시아 전역에서 이루어진 식민지의 팽창,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회의 민주화는 전부 유럽과 그 파 생 사회들의 우월 의식을 키웠다. 과연 민주주의와 제국주의, 인종주의는 서로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36 플랜테이션 농장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진척되던 시대에 인종 분리는 생존의 문제였다. 민주주의적 규범과 시민권을 무조건 수용하면 그 사회의 존립 기반이 흔들릴 것이었기 때 문이다.



한편 전통적인 정제소인 칸드사리 작업장은 공업적 대량 생산에 밀 러나기는커녕 자신들의 규모에 맞게 공업적 혁신을 채택하여 1920년 대에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렸다. 작은 철제 압착기가 인도의 시골을 점 명했듯이, 소규모 원심분리기가 도입되면서 원당 덩어리 위에 수초를 얹어 당밀이 조금씩 녹아 빠져나가게 하는 옛 방식은 사라졌다. 칸드사 리 작업장은 사탕수수 재배에 필요한 땅을 조금 남겨놓을 수 있는 중간 계급 농민들과 접촉한 대리인들의 네트워크 덕분에 공업적 생산 방식의 큰 공장들보다 언제나 확실하게 유리했으며, 수확기에는 가난한 농민이나 토지 없는 소작농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다. 현대의 칸드사리 공장은 밭에 직원을 내보내 주석이 도금된 보일링 팬을 지켜보게 했다. 그 팬에서는 당장에 원심분리기에 집어넣을 수 있는 훨씬 더 깨끗한 설 탕(재거리 jaggery로 알려져 있다)이 생산되었다. 현대화한 칸드사리 설탕이 자와 설탕보다 비용이 50퍼센트 더 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그 맛에 길들여져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와 정확히 똑같이, 소비 자들은 자신들의 전통 요리법의 일부인 설탕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준 비가 되어 있었다. 



쿠바 동부에서는 1912년에 아프 리카계 쿠바인들이 들고일어나 여러 도시를 점령하여 토지 강탈을 기 록한 문서, 다시 말해 강탈을 합법화한 공문서를 파괴했다. 미군은 설 탕 공장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동시에 쿠바 군대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수용소에 가두고 구금되기를 거부한 자들이나 적기에 구금하지 못한 지들을 학살했다. 대다수 희생자는 어떠한 폭력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바로 동부 쿠바의 농민들, 1950년대에도 토지 강탈에 저항하여 투쟁을 멈추 지 않았던 농민들에게서 게릴라 전쟁의 토대를 발견했고 결국 그로써 권력을 장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 령 기아나의 훨씬 더 오래된 플랜테이션 농장주 가문인 캠벨 가문이 회사에 합류했다. 상인으로 출발하여 서인도 제도의 많은 플랜테이션 농 장주들이 채무 불이행에 빠진 1780년대에 광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인수한 가문이었다. 1950년대 초부터는 작 캠벨이 부커 매코널을 떠맡았고 1969년에 명망 높은 부커상 Booker Prize을 창설했다.



설탕 공장 복합 단지는 19세기 중반 이후로 산업화가 어떻게 밭과 공장을 사회적으로 분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였다. 그때만 해도 노예 노동자들이 여전히 압착기를 다루며 유럽인 기술자들과 나란히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공장 가동은 높은 급여를 받는 직원들의 배 타적 영역이 되었다. 경영자의 직책은 거의 유럽의 고국을 떠나온 이주 민들이 차지했는데, 이들은 직업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거나 더 나아가 대학을 졸업한 자들로 높은 임금을 받았으며 회사의 이익도 나누어 받았다. 소수의 현지인도 공장 직원으로 고용되어 실험실 조수 따위의 일 을 했지만 임금은 훨씬 적었다. 그래도 현지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높 은 임금이었다. 그다음은 사탕수수 재배 농민이었다. 이들이 키우는 사 탕수수는 대체로 몇 헥타르에 지나지 않았지만, 소수의 강력한 대지주 들이 있었다. 일은 대부분 엄청나게 많은 사탕수수 수확꾼이 최소한의 임금만 받고 했다. 사탕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공장 직원, 농민, 사탕수수 수확꾼으로 삼분할되는 것이 20세기 초에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사탕무 파종과 수확 시기에는 대체로 여자들과 아이들 약 120만 명이 밭에서 일했다. 전부 합하면 1920년대에 전세 계의 사탕무 밭과 사탕수수 밭에서 일한 사람은 1000만 명이 넘는다. 대부분은 연중 일부 기간에만 일했다. 그렇지만 설탕 생산에는 전 세계 인구의 2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했다. 가구로 환산하면 6~8퍼센트에 달하는 수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미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멕시코인 들은 제한적 성격이 점점 더 강해지는 이민 정책에 맞닥뜨렸다. 그들은 노예 노동자로, 193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문화적으로 독특한 별 개의 인종으로 취급되었다. 상점과 이발소에는 "멕시코인 출입 금지" 하는 푯말이 붙었다. 35 멕시코인은 정착민이 될 수 없다는 인종주의적 주장은 1840년대에 미국이 국경을 확장하여 멕시코 영토의 거의 절반 이상을 합병한 뒤 수많은 멕시코인이 미국 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무 시했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인종주의적 태도는 대공황 초기에 광적인 외국인 혐오증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인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 련해준다는 이유로 미국 시민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체포되어 추방된 멕시코인과 멕시코계 미국인이 최소한 40만 명은 되었다. 최대 180만 명에 이르렀다는 추산도 있다. 



루이스는 결정적으로 식량 생산 농업의 낮은 생산성이 저임금의 기저 요인 중 하나라고 요점을 짚었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국내 농업의 개선이 경제 발전의 핵심 요소라는 결론이 나온다. 82 이에 더하여 총체 적 불평등과 인종 구분, 상향 이동의 부재 등 플랜테이션 농업 사회의 오랜 유산을 지적했다. 83 그는 이러한 조건을 농산물 원자재 생산국의 불리한 위치와 연관 지어 지적했다. 당대 경제 체제의 중심부에는 제국주의적 금융 중심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경제적 과점 구조였다. 해브마이어의 '트러스트'나 독일의 쥐트추 커 같은 정제업자와 생산자의 카르텔을 떠올리면 된다. 반면 주변부는 경쟁이 극심한 시장으로 수출을 했다. 루이스는 세계가 중심부 국가들 과 주변부 국가들로 구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아르헨티나 경제학 자 라울 프레비스크에게서 빌려온 용어인데, 전후 개발경제학의 주요 개념이 된다. 84 설탕은 루이스 이론의 두드러진 사례다. 어쨌거나 설탕 수출국의 수는 19세기에 급속하게 늘어난 반면, 중심부 국가들과 주요 시장은 세 개의 큰 권역으로 조직되었다.



1946년이면 354대의 기계가 1만 8000명의 수확꾼을 대체하여 수확의 절반을 처리했다. 한편 전쟁과 전쟁에 동반된 노동력 부족은 미국 사 탕무 밭에서도 기계화의 속도를 높였다. 어디서나 트랙터가 나타나 파 종하고 잡초를 제거했으며, 동시에 사탕무 수확 기계의 실험도 진행되었다. 어린 사탕무 사이에서 자라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작은 비행기 가 제초제를 살포했고, 1952년까지는 기계로 수확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기계화는 설탕 세계의 계산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고소 득 국가들이 저소득 국가들과 경쟁하기가 더욱 쉬워졌기 때문이다. 18세기 카리브해 지역의 노예는 0.5톤의 설탕을 생산했지만 1950년대 말 하와이의 완전히 기계화한 사탕수수 재배 지대에서는 기계 조작자 한 사람이 그보다 거의 300배 많은 양을 생산했다. 이러한 비교만으로 도 기계화가 가져온 충격을 쉽게 이해할 만하다.



한편 하와이와 모리셔스, 바베이도스, 도미니카 공화국, 푸에르토리 코, 필리핀의 식민지 설탕 부르주아지 가문들은 부동산과 섬유 산업. 기간 시설, 관광, 미디어 등으로 사업 다각화에 성공했다. 마르코스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페르난도 로페스의 형 에우헤니오는 유력한 신문 발행인이자 선주가 되었다.” 영연방의 강력한 설탕 가문들은 그 분 야를 떠나거나 관광을 비롯한 다른 경제 부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21세기에 들어설 무렵에도 여전히 모리셔스의 설탕 공장을 전부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계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조차 다른 부문에 투자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50 푸에르토리코와 도미니카 공화국, 마르티니크는 물론 과거에 영국령 설탕 식민지였던 곳에서도 관광은 새로운 변경이 되었다. 관광업은 다국적 기업의 노동 착취 공장과 하청 부문보다 더 지속력 있는 분야였다. 카리브해에서 300년 동안 사탕수수를 압착한 풍차는 이제 호화 호텔의 냅킨에 찍힌 문양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관광과 역외 거점 사업은 설탕 산업의 붕괴에 따른 일자리의 소멸을 결 코 보상하지 못했다. 카리브해 지역에서 외부를 향한 대량 이주는 설탕 식민지라는 과거가 남긴 영원한 숙제다.



1966년, 일본의 두 과학자가 포도당을 과당 55퍼센트의 감미료로 전화하는 법을 발견했 고, 그것에 액상과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후 화학 공정의 개선으로 1970년대에 액상과당의 비용 가격은 사탕무 설탕과 사탕수수 설 당에 비해 최소한 30퍼센트 적었으며, 비록 페이스트리와 시리얼, 유 제품에만 쓰였지만 음료에서 설탕을 완전히 대체할 잠재력을 보였다. 1979년, 코카콜라가 미국 시장에서 액상과당을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곧 감미료 필요량의 절반을 이 시럽으로 충당했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내 설탕 가격을 세계 시장 가격보다 네 배 높은 수준으로 유지시킨 보 호무역주의가 이 저렴한 감미료의 생산을 엄청나게 떠받쳤다. 액상과당은 거의 모든 탄산음료에 들어갔으며, 1998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사용된 전체 감미료의 절반을 차지했다. 


액상과당 덕분에 세계 최대의 설탕 수입국은 10년 만에 거의 자급 수준에 이르렀고 미국 사탕무 설탕 산업의 일부를 치워버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액상과당이 이미 과잉 생산으로 고통받던 국제 설탕 시장을 심각하게 뒤흔들었다는 사실이다. 세계 시장의 설탕 가격은 1974년에 킬로그램당 2달러 60센트에서 급락하여 1985년에는 고작 6센트밖에 안 되었다.  이러한 추락은 수백만 사탕수수 노동자, 특히 미국에 종속된 국가들의 노동자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설탕 부르주아지는 제국의 상인들, 특히 정제업자들과 비교하 면 회복력이 훨씬 뛰어난 것 같았다. 필리핀의 로페스, 리온다 판훌, 라 베트게 같은 저명한 가문은 전쟁과 혁명을 견디고 살아남아 몇십 년 안 에 제국을 재건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특정 민족이나 종교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대자본과 제휴할 때도 독립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이 오래된 가문들에 글로벌 사우스의 새로운 가족 기업이 합류했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와 똑같이, 이 강력한 설탕 생산자들 대다수가 자국 정 부의 보호관세나 보조금에 힘입어 성장했다.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헨 리 해브마이어가 했다는 이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모든 트러스트의 어머니는 관세법이다." 이는 100년 뒤에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설탕과 에탄올의 수요는 치솟는데 헥타르당 수확량의 증가는 더딘 상황에서, 사탕수수는 점점 더 많은 땅을 잡아먹었다. 사탕수수 재배 면적은 1960년에서 1985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났다. 바이오 연료에 보조금이 지급되면서 재배 면적은 더욱 확대되고 브라질과 미국은 세 계 최대의 에탄올 생산국이 되었다. 53 예를 들면 브라질 페르남부쿠의 사탕수수 재배 면적은 1970년에서 1980년대 말 사이에 거의 두 배로 늘었다. 이러한 증가는 거의 전적으로 에탄올 생산에 들어갔다.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비료 사용, 재앙과 다를 바 없는 산림 벌채, 수질 오 염에다 소농의 전적인 소외, 식량 생산에 쓸 토지의 감소, 곡가 등귀가 동반되었다. 54 비극적이게도 에탄올 생산을 위해 숲을 사탕수수 밭으로 전환한 결과로 화석 연료를 쓸 때보다 탄소 배출량이 더 늘었다(탄 소흡수 능력의 감퇴를 고려하면 그렇다). 55 게다가 사탕수수의 대량 재배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하기에, 이미 취약해진 생태계가 더 큰 위험에 빠졌다. 예컨대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주의 사탕수수 재배 지대는 2010년대에 강수량 감소로 심한 물 부족을 겪었다. 



분명한 것은 설탕 대기업들이 정말로 평판을 걱정하여 기민하게 생태적 책임의 언어를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설탕 대기업은 사회 적 의식이 있는 소비자들을 위한 틈새시장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어서 기쁘겠지만, 그들의 핵심 사업은 계속해서 식품은 값이 저렴해야 한다. 는 대중의 인식에 기대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환경 친화적 소농 생산을 사회적 의식이 있는 부유한 소비자와 연결하는 최 고급 슈퍼마켓이다. 그러나 일반 슈퍼마켓은 대부분 글로벌 사우스의 환경과 농민을 착취하여 생산한 저렴한 식품을 대량으로 쌓아놓고 있다. 67 2018년, 공정 무역의 꼬리표를 달고 판매된 설탕은 겨우 20만 톤에 불과했다. 이는 세계 설탕 생산량 1억 7100만 톤 중에서 지극히 작 은 0.01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청교도주의와 금주 운동은 설탕 소비를 줄이는 대신 반대로 더 욱 장려하는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초에 차는 금주 운동의 아이콘이 었다. 그래서 금주 운동 옹호자들을 '티토틀러(catotaler'라고 불렀다. 그러나 차에도 설탕이 들어갔고, 그뿐만 아니라 차를 마실 때는 사탕과 자와 케이크도 곁들여졌다. 사탕과자 산업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사 람들은 퀘이커교도였다. 술을 피하느라 그렇게 되었다. 1824년에 금주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퀘이커교도 존 캐드버리가 버밍엄에 가게를 열 고 차와 커피를 팔았다. 그는 나중에 코코아도 팔았고 마시는 초콜릿을 창안했다. 퀘이커교도는 또한 18세기 말에 필라델피아를 '사탕과자의 수도'로 바꿔놓았다. 그 전통에서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허시 초콜릿 제국이 탄생한다. 26 당연한 얘기지만 무슬림과 모르몬교도에게는 술이 금지되어 있다. 아마 우연의 일치는 아니겠지만 이 두 종교의 신자들 은 설탕을 아낌없이 소비했으며, 모르몬교도는 놀라울 정도로 많이 섭 취했다.27 설탕과 술은 서로 대용물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타우브스는 베스트셀러 <설탕에 반대하는 논거 The Case against Sugar)에서 이렇게 말한다. "설탕은 술을 갈망하는 신체적 욕구를 진정시킬 수 있다. "



한편 1950년부터 1980년 사이에 미국에서 1인당 탄산음료 소비량은 7.5배 증가했다. 종종 후원금을 대가로 학교에 설치된 자동판매기에서 단 식품이 대량으로 빠져나왔다. 75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병사들에게 해를 끼친 것에 이제 아이들이 노출되었다. 확실한 것은 어린 나 이에 다량의 설탕 섭취에 익숙해질수록 음료 산업과 설탕 산업에 이로 웠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하루 칼로리 섭취량 중 설탕이 차지하는 몫은 평균 500~550칼로리에 이르렀고 영국도 비슷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그 수치는 1000~1500칼로리까지 올라갔다. 성인에게 필요한 칼로리의 절반이다. 반면 1970년에서 1997년 사이에 미국의 우유 소비는 22.5퍼센트 감소했다. 


1974년에 <랜싯>이 사설에서 비만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양학 상의 질병'이라고 확인했을 때 이미 놀라운 자료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메시지가 이해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그랬다. 정치적 계급이 나라에 굶주림이 지속될지 여부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탄수화물의 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굶주림과 영양 부족의 배후에 비만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빈 민층의 구매력이 점차 늘어났어도 그들은 건강한 음식에 닿지 못하고 공업적으로 대량 생산된 값싼 식품만 소비했다. 실제로 20세기에 가난한 노동자들은 굶주리지 않았다. 그들은 한 세대 안에 영양 부족에서 칼로리 과다로 이행했다."



음료 산업과 설탕 산업은 비만 예방은 개별 소비자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강조하기 위해 브랜드를 광고할 때 운동을 하고 바깥 활동을 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곁들인다. 2015년, <뉴욕 타임스》는 코카 콜라의 후원을 받은 연구자들이 설탕이 아니라 운동 부족이 비만의 주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는 기사를 실었다." 자사 음료가 스포츠와 피트니스와 함께하는 삶의 동반자라고 광고하는 마케팅 전략은 담배 산 업에서 빌려온 것이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고,  그러나 약간의 희망이 보이기는 한다. 음료 생산자들이 비만과의 싸움에 긍정적으로 기여할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지만, 담배 산업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비자당 감미료를 대안으로 쓸 수 있다. 



설탕 세계의 과잉 생산과 과도한 착취, 과잉 소비라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으려면 입법부를 바꾸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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