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의 영원보다 가족과의 죽음을 택한 원조 기러기 아빠
<일리아스>를 읽고 이 책 <오뒷세이아>를 읽으면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인생무상(덧없는 인생)
영웅이었던 아킬레우스는 이미 일리아스(트로이)에서 죽었고, 그와 대립하였던 영웅 왕인 아가멤논은 귀향에 성공했으나 아내에게 배신당해 비참한 최후를 당하고 만다. 이 서사시의 핵심 주제는 아가멤논과 대비되는 오뒷세우스의 인생 후반부인지 모른다. 20년 동안 끊임없이 괴롭히는 구혼자들에 둘러싸인 주인공의 아내 페넬로페는 무려 20년 동안 수절했다. 일리아스로 10년 전쟁의 출정을 떠날 때 갓난아기였던 텔레마코스는 잘 자라난 어엿한 성인이 된다. 행복한 가족의 원형이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유명한 거인 퀴클롭스와 키르케, 칼립소 에피소드를 거친다. 심지어 오뒷세우스는 단테 <신곡>의 원형이 될 지옥(하데스) 여행마저 한다. 산 자와 죽은 자, 신의 땅을 거쳐 중년의 오뒷세우스는 금의환향 대신 대머리와 거지꼴이 되어 전우들을 전부 잃고 홀로 귀향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소설 속 주인공보다 더 비참한 몰골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성이 오히려 이 서사시를 수천 년 동안 전승하게 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뒷세우스가 키웠던 개가 그를 알아보고 곧바로 숨을 거두는 장면, 그의 유모가 손님으로 온 주인공을 씻겨주다가 어릴 때 난 상처를 보고 알아보는 장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 등 가슴 먹먹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압도적인 공감은 고전이 되는 충분조건이다. 자연스럽게 저자의 <일리아스>와 비교되는데 이 책은 아무래도 주인공의 부침 많은 인생 여정을 담다 보니 더 큰 반향을 일으킨다. 작가는 '비정한 청동(무기)에 요절하여 영원한 이름을 남기는 전쟁보다 더 위대한 것은 노년이 남아있는 인생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저승(하데스)에 남은 아킬레우스가 유독 쓸쓸하게 보인다.
사족을 붙이면 안티노오스(반+지성), 텔레마코스(멀리서+싸우는 이) 같은 언어유희도 재미있다. 텔레마코스를 이끄는 아테네의 인간 변신 버전인 멘토르는 오늘날 멘토(mentor)라는 단어로 남는다. 여행 에피소드 중 주인공을 돕는(썸 타는) 나우시카아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또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오뒷세이아의 라틴어 표기)의 원형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주인공 리오폴드 블룸의 '하루'를 <나는 솔로> 돌싱 특집처럼 2권으로 늘려 놓았고 호메로스는 오뒷세이아의 20년을 한 권으로 줄였다는 점이다.
한 사람을 제게 말씀하옵소서, 무사 여신이시여, 숱하게 변전한 그이는 신성한 도시 트로이아를 무너뜨린 다음, 참 많이도 떠돌았습니다. 그는 허다한 사람들의 도시를 보았고 그들의 심성도 알아보았지요.
바다에서는 동료들의 목숨과 귀향을 지켜내려고 기백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몸부림쳤음에도 동료들을 구해내지는 못했으니 그들이 저 스스로 택한 잘못으로 파멸해버린 탓이지요..
그 철부지들은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들을 잡아먹었고, 신께서는 그들에게서 귀향의 날을 앗아 가셨습니다. 이 중 어디서부터든 좋으니, 여신이시여, 제우스의 따님이시여, 저희에게 말씀하옵소서.
1권
그러자 그에게 전차를 타는 게레니아의 네스토르가 대답하였다.
"오. 벗이여, 기세를 억누를 길 없는 우리 아카이아인들의 아들들이 그 나라에서 견뎌냈던 그 참상들을 자네가 내게 일깨워주다니!
아킬레우스가 앞장서는 곳이라면 어디든 전리품을 찾아 배들에 올라 안개 덮인 바다 위를 누비며 견뎌냈던 수많은 참상을, 또 프리아모스 왕의 거대한 도시를 둘러싸고 싸우며 견뎌냈던 수많은 참상을! 으뜸가던 이들은 그렇게나 많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네. 그곳에는 아레스를 닮은 아이아스가 누워 있지. 그곳에는 아킬레우스도, 그곳에는 신과 맞먹는 조언자 파트로클로스도, 또 그곳에는 내 친아들이, 다부진 데다가 흠잡을 데 하나 없던 안틸로코스가 누워 있네. 날쌔게 달려 나가 싸우는 일에 월등했지. 이런 것들 말고도 우리는 몹쓸 일이라면 숱하게 겪었네.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인간 중에서 그 모두를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신과 같은 아카이아인들이 그곳에서 몹쓸 일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설령 자네가 오 년이고 육 년이고 곁에 눌러앉아 물어보겠노라 해도,
그 전에 자네는 심란해져 고향 땅으로 돌아갈 걸세.
3권
그녀는 곶 위에 올라앉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마른 적단 한 번도 없었고, 귀향을 두고 탄식하며 그의 달콤한 생애도 떠내려가고 있었다. 요정도 그를 더는 즐겁게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다하는 그는, 바라마지않는 그녀 곁에서
밤에는 우묵 파인 동굴에서 억지로 자야만 했고,
낮에는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아
<눈물로, 탄식으로, 고통으로 제 기백을 찢어놓으며,> 곡식을 거둘 수 없는 바다를 눈물을 쏟으며 응시하곤 했다.
여신들 중의 여신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말하였다.
"운명에 매인 이여, 이제 더는 여기서 탄식하지도 말고, 당신의 생을 소진하지도 마세요. 내 이제는 그대에게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나 그대를 보내드리겠어요. 자, 이제 저 아름드리나무들을 청동으로 벤 다음 널찍한 뗏목을 짜 맞추세요. 그 위에는 갑판도 높이 고정해두고요. 그 뗏목이 안개 덮인 바다 위로 당신을 데려갈 수 있도록요. 나는 당신에게 허기를 막아줄 빵과 물, 그리고 원기에 맞갖은 붉은 포도주를 그 안에 실어드릴게요. 또, 당신에게 옷을 입혀드릴 거고, 당신을 위해 뒤에서 순풍을 보내드리지요. 그러면 당신은 아무런 탈 없이 고향 땅에 다다를 수 있겠지요. 만일 그것이 사려에서도, 성취에서도 나보다 한결 나은, 너른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신들이 바라는 바라면!"
5권
엄청난 공을 들여 만든 방안으로 그녀가 들어가자, 거기에는 한 소녀가 잠들어 있었으니, 그 자태와 용모가 죽음을 모르는 신들과 똑같은 나우시카아, 웅대한 기상을 품은 알키노오스의 딸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카리스 여신들에게서 아름다움을 얻어낸 시녀 둘이
두 기둥의 양편에 자리하였고, 눈부신 방문은 잠겨 있었다. 여신은 마치 바람의 숨결처럼 소녀의 침대로 내달려 그녀의 머리맡에 서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니 그 모습이 배로 이름난 뒤마스의 딸과 같았다.
그녀는 나이도 같았고, 기백으로 아껴주는 사이였다. 그녀의 모습을 하고, 빛나는 눈의 여신이 소녀에게 말하였다.
"나우시카아, 네 어머니는 어쩌자고 이렇게 게으른 딸을 낳으셨을까? 눈부신 옷가지들이 엉망으로 널려 있구나.
너는 좀 있으면 결혼도 할 애가! 거기선 네가 아름답게 차려입어야 하고
네 들러리를 서줄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옷들을 내줘야 하잖니.
바로 그런 데에서 너에 대한 좋은 소문이 사람들에게로 퍼져 가는 거고 아버지도, 공경하올 어머니도 흐뭇하시겠지.
자, 동이 트는 대로 빨래하러 가자꾸나.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나도 손을 보태러 같이 갈 테니까.
네가 미혼으로 있을 날도 이제 오래 남진 않았지.
네 혈통이 뻗어 나온 곳이기도 한 파이아케스 백성들 모두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사람들이 네게 이미 청혼하고 있으니까.
자, 동트기 전에 네 이름난 아버지를 졸라
허리띠, 겉옷, 그리고 눈부신 담요들을 실어 나를 만한
노새들과 마차를 준비해달라고 해보렴.
6권
그는 따뜻한 목욕물을 보자 기백으로 반가웠으니 머릿결도 고운 칼립소의 집을 떠난 이후로 어떤 보살핌에도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전까지 그는 마치 신과 같이 흔들림 없는 보살핌을 받아왔다.
시녀들은 그를 씻겨준 다음, 올리브기름을 펴 발라주었으며, 그에게 근사한 외투와 통옷을 걸쳐주었다.
그러자 그는 욕조에서 나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신들에게서 아름다움을 얻어낸 나우시카아는 빈틈없이 지어놓은 지붕의 기둥 곁에 서서 두 눈으로 오뒷세우스를 바라보며 경탄하다가 그에게 소리 내어 날개 돋친 말을 건네었다.
"평안하시기를요, 손님, 당신의 고향 땅에 가 계시더라도 가끔은 저를 떠올리시도록요. 당신은 누구보다도 내게 먼저 생명의 빚을 지고 있잖아요."
그러자 꾀 많은 오뒷세우스가 그녀에게 대답하며 말하였다. "웅대한 기상을 품은 알키노오스의 따님 나우시카아여, 벼락을 내리치시는 헤라의 부군 제우스께서 이제는 그렇게 제가 집으로 돌아가 귀향의 그날을 보게 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곳에서도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 당신께도 기도하겠습니다. 날마다 언제까지나요.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하셨으니까요, 아가씨."
8권
이것이 두루 이름난 가수가 부른 노래였다. 그러나 오뒷세우스는 녹아내렸고, 눈물은 눈꺼풀 아래 두 뺨을 적시고 있었으니, 마치 한 여인이 제 남편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것만 같았다.
남편은 도시와 아이들을 위해 비정한 날을 물리쳐내려다가 제 백성들과 도성 앞에서 쓰러졌으니, 여인은 숨이 끊어져가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이를 보고는 그 위에 쏟아져 내리며 목 놓아 통곡해보지만, 저들은 그녀의 등과 어깨를 창으로 때리며 노역과 곤경을 겪도록 끌고 가니,
더없이 가련한 고통으로 그녀의 두 뺨은 쇠잔해져간다. 꼭 그처럼, 오뒷세우스 역시 가련하게 눈썹 아래로 눈물을 떨구었다. 그는 거기서 다른 모든 사람의 눈길을 피해 눈물을 쏟았으나,
오직 알키노오스만은 이를 보고 알아차렸으니 그와 가까이 앉아 있었기에 그의 무거운 탄식을 들었던 것이다.
8권
무엇보다도 가증스럽게 녹여버리며 사지에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무슨 질병이 내게 다가온 것도 아니란다. 그런 게 아니라, 눈부신 오뒷세우스야, 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너의 조언들과, 그리고 너의 그 다정함이 꿀처럼 달콤한 내 목숨을 앗아 갔단다.'
11권
저는 시쉬포스가 두 손으로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를 밀어 올리며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도 보았답니다.
그는 두 손과 두 발로 지탱해가며 언덕 꼭대기를 향해 바윗덩어리를 밀곤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정상 너머로 던져버리려고만 하면, 그 대단한 무게로 바위가 도로 밀려나지요. 그러면 염치를 모르는 그 바위는 다시 땅으로 굴러 내려가고, 그는 사지에서 땀을 쏟아내며, 머리에서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채로 다시 몸을 뻗어가며 바위를 밀지요.
11권
배는 바람과 조타수들이 똑바로 몰고 있었고요.
그때 저는 심장으로 애달파하며 전우들 사이에서 입을 열었습니다. '벗들이여, 여신들 중의 여신인 키르케가 내게 말해준 신탁을 그저 한두 사람만 알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내가 말하겠네. 그래야 자네들도 알고, 죽게 되든가, 아니면 죽음과 죽음의 여신을 피해 달아날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일단 세이렌들의 신들린 음성과, 꽃 피어난 초원을 피하라고, 그러나 다만 나 혼자서만 그 음성을 들으라고 명령하는구나. 자네들은 나를 똑바로 세워 고통을 안기는 밧줄로 돛대 받침에 나를 묶어주게. 내가 그 자리에 흔들림 없이 머물 수 있도록 말일세. 밧줄 끝은 돛대에 묶어두고. 만일 내가 자네들에게 풀어달라고 애원하며 명령하거든, 자네들은 그때 더 많은 밧줄로 나를 짓누르도록 하게.'
12권
아직 집에 있는 흠잡을 데 없는 네 어머니를 만나게끔 보내달라 하여라. 벌써 친정아버지며 오라비들이 그녀더러 에우뤼마코스와 결혼하라며 성화란다. 구혼 선물에서 그자가 다른 모든 구혼자들을 능가하고 혼수도 엄청나게 키워놨기 때문이지. 그러니 이제 그자가 네 뜻을 거슬러 네 집 밖으로 재산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여라. 여자의 가슴속 기백이라는 게 어떤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여자는 자기를 데려간 사람의 살림이 커지기를 바라지. 먼저 결혼했던 제 남편이 일단 죽고 나면, 그 남편도 자식들도 더는 기억에 남기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단다.
자, 네가 돌아가거든 시녀들 중 네 보기에 가장 나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일일이 맡기거라, 신들이 너를 위해 영예로운 아내를 보여주실 때까지.
15권
그녀는 이 일을 마치더니 되돌아갔고, 오뒷세우스는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친아들이 그를 보며 경악하더니 혹시 그가 신일까 싶어 두려움에 휩싸여 눈길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그에게 소리 내어 날개 돋친 말을 건네었다.
"손님, 조금 전과는 달리 지금 그대는 다른 모습을 드러내시는군요. 옷도 달리 입고 계시고, 살갗도 더는 전과 같지가 않습니다. 그대는 너른 하늘을 차지하고 계신 어떤 신임이 분명합니다. 부디 너그러워지소서, 임께 기쁨이 될 제물과 황금의 선물을 마련하여 바치겠나이다. 부디 저희를 살려만 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잘 참고 견디는,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가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신이 아니란다. 너는 왜 나를 죽음을 모르는 분들에게 견주느냐? 그게 아니라, 내가 너의 아버지란다. 그로 인해 네가 신음하며 숱한 고통을 견뎌내었고, 사람들의 폭력을 받아낸..."
16권
이렇게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개 한 마리가 누워 있다가 머리와 귀를 세워 올리니, 심중에서 견뎌내는 오뒷세우스의 개 아르고스였다. 한때 그는 이 개를 손수 길렀지만, 정작 부려보진 못하였으니 그러기도 전에 그는 신성한 일리오스로 떠났던 것이다. 전에야 젊은이들이 야생 염소며 사슴, 그리고 토끼를 몰러 이 개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주인이 떠나고 없는 지금은 눈길조차 받지 못한 채 많은 분뇨 더미 속에 누워 있을 따름이었다. 오뒷세우스의 하인들이 그 큰 영지에 거름을 주러 가져가기 전까지는 대문 앞에 노새와 소들의 분뇨가 넘치도록 쌓여 있었고, 거기에 아르고스라는 개가 진드기투성이가 된 채로 누워 있었다. 바로 그때 그 개는 오뒷세우스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차리더니 꼬리를 흔들며 두 귀를 내려보았지만 주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기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에우마이오스의 눈길을 쉽게 피하기 위해 먼 데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치더니 이렇게 물어보았다.
"에우마이오스, 저 분뇨 속에 누워 있는 개는 정말이지 놀라울 지경이군요, 저 아름다운 체격이며, 하지만 이 개가 이만한 용모에 더해 달리기까지 빨랐던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식탁 가에서 기르는 개들 같은 것인지, 확실히는 모르겠군요. 그저 뽐내려고 그런 개들을 기르는 주인들도 있으니까요."
17권
그가 이렇게 말하자 노파는 더없이 눈부신 대야를 가져오니, 이는 예전에도 그의 발을 말끔히 씻겨주곤 하던 것이었다. 그녀는 먼저 찬물을 넉넉히 부은 다음,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한편 오뒷세우스는 화로에서 떨어져 앉아 어둠을 향해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잡다가 그만 흉터를 알아보고 일이 탄로 나지 않을까, 온 심정으로 직감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제 주인을 씻겨주려고 가까이 다가왔고, 그 흉터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그것은 예전에 그가 제 어머니의 어엿한 아버지인 아우톨뤼코스와 그 아들들과 함께 파르나소스에 갔다가. 멧돼지가 흰 이빨로 그를 들이받아 생긴 흉터였다. 아우톨뤼코스는 도둑질과 맹세에서 모든 인간들을 능가했는데, 그것은 그가 어린 양들과 새끼 염소들의 사태를 태워 바치자 흡족해진 헤르메스 신이 손수 그에게 선사한 것이었으며, 신은 그를 염려하며 동행해주었다. 아우톨뤼코스가 이타카의 기름진 나라로 와서 그의 딸과 갓 태어난 아기를 만났을 때였다. 그가 식사를 마치자, 에우뤼클레이아는 그의 두 무릎에 아기를 올려놓더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우톨뤼코스여, 이제 따님의 친아드님에게 붙일 이름을 당신께서 손수 찾아 주세요. 많이도 바라오던 아기잖아요."
19권
노파는 두 손바닥으로 쥐고 매만지다가 이 흉터를 알아차리더니. 그만 발을 놓치며 떨어뜨려버렸고, 그의 종아리도 대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청동은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반대쪽으로 도로 기울어졌고, 물은 흙바닥 위로 쏟아져버렸다. 환희와 설움이 한꺼번에 그녀의 횡격막을 움켜쥐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 차올랐으며, 그 맑은 음성도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녀는 오뒷세우스의 턱을 쥐고 말하였다. "너 정말 오뒷세우스로구나, 내 새끼.
내 다 두루 만져보기 전까진 내 주인을, 너를 알아보지 못했구나!"
19권
그러자 그때 꾀 많은 오뒷세우스가 아내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내가 전우들과 나 자신의 귀향을 찾아내러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 자, 가볼까요, 여보. 우리 침대로 갑시다. 우리 달콤한 잠에 들어 낙을 누려봅시다."
23권
그러자 이번에는 아트레우스의 아들의 영혼이 말하였다. "행복한 이여, 라에르테스의 아들이여, 허다한 계책에 밝은 오뒷세우스여! 그대는 대단한 덕을 지닌 아내를 얻었으니. 이카리오스의 딸, 흠잡을 데 없는 페넬로페에게는 얼마나 훌륭한 헤아림이 있는가! 결혼한 제 남편 오뒷세우스를 얼마나 잘 기억했던가! 그러니 그녀의 탁월함에 관한 명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모르는 분들께서는 대지 위에 사는 자들에게 속 깊은 페넬로페를 위한 우아한 노래를 지어주시리라. 그렇지 않은 튄다레오스의 딸은 몹쓸 짓들을 꾀하여 결혼한 남편을 쳐 죽였으니, 사람들에게 가증스러운 노래가 되리라. 그리고 여인들에게는, 심지어 제대로 처신하는 여인에게도 혹독한 평판이 뒤따르리라."
24권
이렇게 말하자, 고통의 먹구름이 그를 뒤덮어버렸다. 그는 두 손으로 잿빛 흙먼지를 부여잡아 회색빛 머리 위로 쏟아부으며 목 놓아 절규하였다. 그러자 친아버지를 바라보던 그의 기백이 동요하였고, 뻐근한 기운이 그의 코끝을 눌렀다.
그는 뛰어들어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입 맞추며 말하였다.
"당신이 묻고 계신 그 사람이 바로 여기 있는 접니다. 아버지!
24권
희랍인들은 인간 위로 신이 있고 아래로 짐승이 있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금기로 여겼다. 키르케의 섬에서는 이 모두가 어지러이 섞인다. 헤르메스가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며, 늑대와 사자가 강아지처럼 군다. 키르케를 두고 여인인지 여신인지 분간하지 못하던 부하들은 돼지로 변한다. 오뒷세우스는 여신과 몸을 섞고, 다 시 인간의 모습을 찾은 일행은 신들처럼 잔치를 벌인다. 이 혼돈 속에서 오뒷세우스는 고향을 잊어가고, 고향에서도 그는 잊혀간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각성해야만 한다. 희랍인들은 인간을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을 담아 브로토스(brotos)라고 불렀다. 반대로 신들은 암브로시아(ambrosia), 즉 '불멸'을 먹고 마시며 영원을 살아간다. 따라서, 그의 다음 행선지는 저승이다.
키르케,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