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야만 안정되는 사람이 있다. 이를테면 주식에서 수익을 내면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손실 중이면 안정감을 느끼는 심리와 같다. 앞서 예시는 인간이 가진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에 비추어 볼 때 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가당착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익은 곧이어 손실로 변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신의 비극이 안정감을 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 같은 이익과 손실을 볼 경우 이익으로 얻는 기쁨보다 손실로 갖는 괴로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한 사람의 생애로 확대해 보면 불안을 찾는 사례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선두에 있는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성적이 곤두박질칠까 봐 두려울 것이다. 직장을 갖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게 되면 회사에서 실직할지 몰라 불안해한다. 정리하면 불안은 곧 소유에서 비롯된다. 내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잠재적으로 잃을 총량이 비례적으로 늘어난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에 봉착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소유권을 잃고 싶지 않기에 불안은 멈출 수 없다. 그로 인해 비극은 시작되어 멈추질 않는다. 불안은 곧 대타자이다. 자본주의는 당신에게 소유를 강요하는데, 마치 밟은 지뢰와 같이 발을 떼면 폭발하는 삶을 대가로 지불한다. 당신은 언젠가 무능력한 처지에 놓일 것이며 그러면 무일푼이 될 위험이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축적해야만 한다. 그런데 많이 가질수록 잃어버릴 위험은 커진다.
불안한 상태를 안정으로 여긴다는 의미는 안정된 상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한 줄타기를 멈추고 싶으면 앞뒤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바닥은 심연처럼 보인다. 계속 상징계를 통해 줄타기를 이행해야 한다. 줄타기를 멈추면 우리는 실재계, 죽음과 같은 공허함을 맛보게 된다. 그것을 안정이라고 칭해보자. 당장 굶주릴지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버려질지도 모르지만 풀(full) 소유 대신 무소유는 자기 자신을 비로소 욕망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소유물 없이 부모에게 보살핌 받았던 존재였을 때 마음껏 배설하고 섭취할 수 있었다. 언어를 배워 상징계에 포섭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이름을 더럽혀선 안되었다.
더 없는 안정감을 갖고 싶은가? (사실상 불가능하겠지만) 버는 사람이 아닌 오로지 소비만 하는 사람이 되어라. 불안 속에서 안정감을 찾는다면 당신은 일찌감치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혹은 나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생산물은 거미줄과 외형이 비슷하지만 거미줄과의 차이점은 먹잇감만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옭아맨다는 점이다. 놀면 뭐해? 놀면 당신은 안정감을 느낀다. 끊임없이 일하면 안타깝지만 당신은 계속 불안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