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시인에게 미안하지만 그의 시제를 비틀어 오늘의 일기 제목을 지었다.
나는 원래 슬픔을 잘 느끼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슬픔을 일반적인 상황으로 잘 받아들인다. 그 비결은 항우울제와 동일한 성분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남들보다 분비되도록 매번 성공만 하는 인생을 살아서가 아니다. 앨릭스 코브의 <우울할 땐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우울증의 레벨을 다르게 태어난다고 한다. 나는 그 우울증의 설정값이 약간 높게 설정되어 있기에 약간의 슬픔은 그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함일 뿐이다. 오히려 슬프지 않으면 조금 어색할 지경이다. 고독도 애써 즐기는 편이다.
적어도 슬픔에 대처하는 점에 있어 내 장점은 고대 로마인들이 덕으로 여긴 것처럼 후회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같은 실수를 남들보다 자주 반복한다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으니 덜 슬프지만 다시 슬퍼질 일을 반복하게 된다. 이를 우리는 '악순환'이라고 한다. 실수에서 배우는 것도 없지만 후회도 없다. 이것이 나의 항상성(homeostasis)이다.
이런 사람에게 슬픔이 찾아오는 경우도 간혹 존재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슬픔을 가둬두기 위해 내가 의식적으로 그러한 정서를 촉발한 사건을 계속 상기시킬 때 발생한다. 다들 비슷하겠지만 나는 꽁꽁 숨겨둔 열등감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의 내핍한(가난한) 삶을 긍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 삶이 주변인들에게, 특히 나보다 무척 가까운 사람의 발화(말)로 인해 객관화(self-awareness)를 겪게 되면 슬픔이 하릴없이 밀려온다.
보통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즉시 털어내버린다.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그린힐>에 등장하는 오카 미도리처럼 선택적 기억상실 능력을 통해 슬픈 장면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나는 우울한 정서를 마치 이물질을 품은 조개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고 몇 년 지나도 슬픔이 진주가 될 것 같진 않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이 순간과 이 글을 다시 꺼내 보는 동안 슬픔이 있는 15초를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또 슬픔을 잊어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