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간에 한 번쯤 봤을 로마시대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의 석고상을 기억하는가? 한때 로마 제국 권력의 최정점까지 올라갔던 그는 제자였던 네로 황제에게 자살을 명령받고 손목을 그었지만 노년이라 피가 잘 나오지 않아 사우나에서 길고 힘들게 죽었다고 한다. 생전의 모습 역시 권력무상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가지고 있던 지병(천식) 때문인지 몰라도 세네카는 슬퍼 보인다.
그의 실제 인생 평가*에 대해서는 별론으로 하고 나는 세네카의 방대한 서간집 모음인 <인생론>을 읽고 그의 사상을 좋아했다. 해방 노예 에픽테토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빛나는 후기 스토아학파의 거두로서 수많은 명언이 담겨있다.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얼마 전 내게 벌어진 어떤 사건에 대한 분노를 추스르기 위해서이다.
* 로마 식민지에서 이룬 고리대금으로 막대한 치부를 해서 당대에도 철학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공격을 당한 바 있어 스스로를 변호했다.
주말을 맞아 아내와 자주 들르는 동네 마트를 갔다. 나는 카트를 몰고 가고 있었다. 야채 코너쯤에서 내 바로 앞에서 40대 초반쯤의 러닝 복장을 한 여자가 혼자 장을 보고 있었다.
나는 카트를 밀고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가 가는 동선에 그 여자가 갑자기 돌진하듯 달려와 내 앞길을 막고 이것저것 야채를 집었다. 그때부터 정상이 아닌 것 같은 그녀의 행동에 1차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카트를 옆으로 돌려 가는데 거기엔 또 그 사람의 카트가 파킹 되어 있었다.
즉, 쉽게 말해 카트를 끌고 장을 봐야 하는 암묵적 룰을 어기고 좁은 복도 두 개를 자신의 몸뚱이와 카트로 길을 막은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많이 화가 났지만 아내에게 길을 터달라고 해서 그녀의 카트를 살짝 옮기고 내 카트를 끌고 전진했다.
별안간 무언가 물건이 날아오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 등 뒤에서 바로 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내 길을 2번 막은 사람이 자기 카트를 치웠다는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나를 향해 물건을 집어던진 셈이다.
순간 뒤를 돌아보고 싸울까 하는 수 초간의 고민이 생겨났다. 전형적인 치킨게임이다. 정상이 아닌 여자와 싸워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어쨌든 나는 나직하게 아내에게 "이 여자 미쳤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Fight or Flight'에서 후자를 택한 셈이다. 나는 말 그대로 겁쟁이(치킨)이 되어버렸다.
이후에도 장을 보는데 그 여자가 장을 안 마쳤는지 몰라도 자꾸 뒤에서 얼쩡댔다. 기분이 좋지 않아 한 번만 부딪치면 당한 것 이상을 갚아주는 'Tit for Tat' 전략을 쓰고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별일은 없이 끝났다. 하지만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기억 속에 흐릿해질 때까지 부당한 공격에 대해 보복하지 못한 것에 신경 쓰일 것 같았다.
내면의 분노가 일렁이고 시간이 지나 수면이 조금 잠잠해지자 잊혔던 세네카의 글귀가 떠올랐다. 세네카는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소(小) 카토의 에피소드를 인용했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카이사르와 싸웠던 강력한 엘리트 정치가였다. 하지만 그에게 광장에서 무례하게 침을 뱉고 주먹을 휘두른 민중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카토는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갔다. 동양에도 유명한 과하지욕(胯下之辱)이라는 고사가 있다. 한신이 무명이던 시절 불량배가 그가 큰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자신을 한 번 죽여보고 못하겠으면 가랑이 아래로 기어가라고 시비를 건 적이 있다. 그는 가랑이 아래로 기었고 나중에 대장군이 되어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을 이루고 초왕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서두에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평생의 행복한 삶을 살다가 말년이 좋지 않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나쁜 것인가? 또한 반대의 경우도 질문한다. 평생이 불운하다 말년이 좋으면 그 인생은 좋은 것인가? 누구나 단번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카토와 한신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치욕을 참아가며 역사에 남을만한 큰일을 완수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카토는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했고, 한신은 토사구팽이라는 고사 성어의 주인공답게 요참형에 처해 죽었다. 카토의 일화를 소개한 세네카 역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말년이 좋지 않았다.
앞서 말한 스토아 학자 중 에픽테토스은 절름발이 노예 출신이기도 했다. 노예였지만 죽기 전에는 철학자로 황제와 알현을 했던 유명한 철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반대로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명한 <명상록>은 그는 재위 대부분을 게르만족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터의 열악한 환경에서 틈틈이 썼다. 후세에 로마의 오현제로 불렸던 그의 인생은 과연 행복했을까?
인생을 이어간다면 억울하게 마트에서 뜻하지 않게 분노조절장애 빌런(villain)과 마주치는 것처럼 분노와 좌절의 시간이 확률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분명하게 행복과 반대되는 감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외부의 사건에 대해 관여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형벌'에 처해졌다고 하는데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조차도 힘들다. 당장 다이어트나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 보라.
반대로 세네카를 비롯한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감정 컨트롤은 거의 전적으로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그러니까 인생의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불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고는 현대 심리학의 사고와도 유사하다. '기분 = 행복감-불행감'이기 때문이에 내가 어떤 환경 때문에 반드시 행복과 불행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상황을 해석하는 자신에 따라 상대적이다.
이제는 마트에서 만난 빌런이 고맙기까지 하다. 고난은 글의 소재가 되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난을 맞아 헤쳐나가며 철학자가 되어간다. 이제 앞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에 대해 약간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년 운, 중년 운, 말년 운이 좋건 나쁘건 간에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매번 자제력 문제로 불필요하게 타인과 분쟁을 일으킨다면 스토아주의나 심리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뇌기능 장애(이를테면 전전두엽 기능 저하)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정신의학과를 찾아가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