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카도 씨를 수경재배하면 싹을 틔우고 자라난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 있었다. 순전히 호기심에 그날 이후로 집에서 먹고 남은 아보카도 씨를 버리지 않고 모아 일회용 플라스틱 커피컵에 이쑤시개를 꽂아 달아놓고 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혹시 몰라 10개 넘는 씨앗을 모아 동시에 발아를 시도했다.
하필 겨울에 아보카도 재배를 도전해서인 이유도 있겠지만 열대 식물인 아보카도가 자라기에는 한반도라는 환경은 부적합했나 보다. 아보카도 씨앗 중 단 한 개만이 싹을 틔웠다. 그리고 녀석은 싹을 틔우고 수년이 지나는 동안 조금씩 자라나 내 키의 절반 정도까지 커졌다. 어느 날 식물원에서 아보카도를 보니 우리 집에서 키운 그것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내심 뿌듯했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장거리 이사를 갔을 때도 아보카도는 연약한 줄기로 이루어진 몸으로 그 고된 이사를 견뎌냈다. 새로운 환경인 강릉에서도 잘 자라났다. 단, 그 사이 아보카도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내가 물을 많이 주는 바람에 아파트 거실 타일이 물기가 차서 곰팡이가 생기는 문제가 있었다. 아내는 이 사실에 화가 났다. 나는 아보카도를 내 서재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예상치 못한 유폐 생활이 문제였을까? 거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재는 일조량이 적었다. 아보카도는 조금씩 시들어갔다. 눈치를 보다가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받침대를 보강하는 조건으로 아보카도는 다시 거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히 거실로 돌아와 녀석은 생기를 찾았다.
가녀린 줄기에 비해 잎사귀가 굉장히 컸던 아보카도는 거실로 돌아온 이후에는 언제부턴가 잎의 크기가 줄어들고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금년의 여름이 시작될 무렵 우연히 아보카도를 살펴보니 잎사귀들이 전부 고개를 늘어뜨려 놓았다. 아내가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더니 물이 부족한 것 같다고 흠뻑 물을 주고 기다리면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아파트 베란다 쪽 개수대에서 물을 주고 반나절을 기다렸다. 여전히 아보카도는 축 늘어져 있었다.
불현듯 사람에게 죽음의 징후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이다는 어느 요양보호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한 죽음의 신호가 공통적이기에 의사들은 자녀 등 환자의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것이다. 진화(進化)라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두고 볼 때 인간과 아보카도는 머나먼 친척이다. 인간과 식물이 죽기 전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는 지나친 가정과 비약을 통해 묘한 숙연함이 느껴졌다.
결국 나는 아내와 아보카도 화분을 들고 화원에 갔다. 지력이 약해져서 분갈이라도 하면 나아질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과수분 때문에 죽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아보카도는 최종 사망 판정을 받았다. 이제 이 화분에 흙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아보카도는 없다.
조금만 더 아보카도에 대해 찾아봤다면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랬겠지만 시간은 비가역적이다. 이제 나는 국내 화원에서 잘 팔지도 않는 아보카도 나무로 대체하는 것도, 처음부터 마트에서 아보카도를 사서 과육 속에 담긴 씨앗을 꺼내 다시 키울 자신이 없다. 내가 아보카도에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이케아 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같은 논리라면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은 아보카도 나무에 지금이라도 존재의 감사와 이별 인사를 전한다.
* 이케아 효과(IKEA effect) : 소비자들이 자신이 직접 조립한 제품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인지 편향 현상
https://youtu.be/aIzh6oWVlRM?si=vNwU9J_tnCZHERy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