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복판에서 아내와 동해안의 관광명소인 한 암자를 찾았을 때 일이다. 우연히 지나가던 어떤 노부부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적어도 70대 중반 이상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자기 또래의 할머니에게 볼프강 폰 괴테의 유언을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강한 어조로 "그런 이야기는 당신이 잘 됐을 때 이야기해!"라면서 말을 끊었다. 할아버지는 화를 내기보단 겸연쩍은 표정으로 아내의 표정을 바라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묵언수행에 돌입했다.
전에 얼핏 읽었던 것 같아 문득 괴테의 유언이 궁금해져 찾아보았다. 그는 생전에도 대문호로 칭송받았기 때문에 유언도 고인의 명성에 걸맞게 멋져야 한다는 주변의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언은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먼저 두 개는 멋지다. 하지만 마지막은 멋지지 않지만 매우 인간적이다. 세기의 천재로 알려진 괴테 역시 죽음의 순간은 평범한 인간들과 동일한 것이다.
"더 많은 빛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친구들의 주장)
“이리 오너라, 그리고 나에게 너의 사랑스러운 손을 다오. 마지막 숨까지 강한 정신력을 잃지 않고 사랑스러울 수 있기를.” (며느리의 주장)
“그는 나에게 요강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꼭 붙들고 있었다.” (하인 크라우제의 증언)
- 괴테, 마지막 임종순간 요강 붙잡았다?, 2006.11.7, 화이트페이퍼
어느 신경외과 의사가 썼던 칼럼이 생각난다. 대체로 노화, 질병에 의한 상황이라면 유언을 절명의 순간에 할 수 없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러므로 정신이 또렷할 때 미리 유언을 남기라는 말이다. 나 역시 아직 유언장을 작성한 적은 없다. 하지만 죽음은 대체로 예고하지 않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늦기 전에 해야 할 숙제가 생겼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목적은 죽음과 유언은 아니다. 할머니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할아버지의 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그간 결혼생활 동안 지은 죄가 많아서 할머니의 참담한 무시를 감내했을까? 아니면 그저 할머니의 성미를 말없이 감내하는 소극적인 성격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관계가 부부인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나는 그들을 모르니까.
연애 감정의 케미스트리는 없고 화와 불만만 가득한 부부 바이브(vibe)를 풍기는 노인들. 할아버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데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반대로 할머니는 상대방의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무가치한 것으로 단정하고 무작정 듣고 싶지 않다. 둘 중 누가 더 잘못이 클까?
구태여 물어보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바꿔 말하면 물어본 것에만 답하는 삶이 정답인가? 아니면 물어보지 않아도 마음대로 지껄이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수요 없는 공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철학자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역설을 들어 설명한 바 있다. 주인은 자신의 자아상을 확립하고자 노예를 지배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진정으로 자의식을 가진 것은 노예이다. 그 이유는 주인의 자아는 노예의 인정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주인이 될 수 없다. 반면 주인은 노예를 자신과 동등한 자의식을 가졌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주인과 노예 중 진정한 자의식을 가진 자는 노예가 된다. 노예는 복종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이제 다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는 할아버지, 말을 못 하게 막는 할머니는 대등한 관계인가, 아니면 주종(주인과 노예) 관계일까? (두 사람 사이 사적인 역사를 제외하고) 그 순간만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괴테의 유언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하는 할아버지는 노예인 동시에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다.
그러니 진정한 나로 살고 싶다면 물어본 사람, 궁금한 사람, 조언을 요청한 사람이 없다면 침묵하고 그저 글을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