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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피지(slippage) in 서울

by pathemata mathemata

만일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도 없이 삶의 형태를 바꿀 수 있다면, 사람이 많은 서울에 살 것인가? 아니면 한적한 지방에 살 것인가?


4년 조금 넘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회사 발령으로 아내와 함께 지방에서 거주한 지 1년 반이 지났다.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이번에는 반대로 서울로 여행 가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서울에 비해 조용한 지방에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졌다. 금요일 출발, 일요일 도착 일정으로 KTX를 타고 서울역을 향했다.


역사에 도착하니 건물 안 북적이는 많은 사람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간이 짧았던 것일까? 아니면 출퇴근길의 복잡함에 비해서는 인구 밀도가 여유롭고 출근시간의 압박감이 없어서였는지 모른다.


숙소를 용산역 근처로 하여 강북의 사대문 안팎을 주로 돌아다녔다. 대부분 한 번 이상 가본 곳이지만 서울을 떠난 뒤에 들르니 느낌이 묘했다. 종로 3가, 종묘와 같은 오래된 곳부터 용산의 해방촌 같은 힙스터들의 성지를 들렀다. 이제 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밝힐 차례이다. 뚜벅이로 걸어 다니다 보니 지도 상으로는 가까워 보이는 곳도 기본적으로 최소한 30분은 소요되었다. 지하철을 타건, 버스를 타건, 심지어 택시를 타건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물론 자가용으로 다닌다고 해서 딱히 나아지는 점은 없다. 교통 체증에서 오는 운전 스트레스도 있지만 그보다 주차장을 찾아 전쟁을 치러야 하는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할 때 멋모르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운전대를 잡았다가 무려 3시간 반을 갇힌 적 있다. 여의도에서 한 블록을 지나가는 데만 1시간이 넘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전설에 따르면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의도 빌딩 지하 주차장에서 한 개 층을 올라가는데 1시간도 더 걸려 결국 차를 버리고 갔다는 무용담도 있다.


이 지독한 시간 낭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울에서 살아가면 이 모든 불합리함이 전부 이해된다. 왜냐하면 하루 최대 1천만 명의 유동인구 모두 동일하게 겪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량 통제를 받는 의전서열 1위인 대통령이 된다면 더 이상 문제가 아닐 순 있겠다. 하지만 하늘에 태양이 1개뿐이듯 대부분의 삶은 길거리에 버려진 개들처럼 시간을 버티는 것이다.


그로 인해 역세권도 모자라 초역세권, 더블/트리플 역세권 등이 최고의 부동산 자산이 된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는 시간을 1분 1초라도 아끼려는 것이다. 반대로 직장이나 학교, 학원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과 먼 경기도에 산다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왔던 경기도민의 설움을 비유한 계란 프라이의 '흰자'에 사는 것이다(계란 노른자는 서울을 의미한다).


서울에 살던 2년간은 운 좋게 사무실까지 도어 투 도어(door-to-door)로 30분이 걸렸다. 불행히도 사무실이 이전하는 바람에 두 배 늘어난 1시간을 출근에 썼고, 마지막엔 경기도 일산으로 발령이 나서 지하철 2번에 버스 1번을 환승해 1시간 반을 써야 했다. 왕복으로는 총 3시간을 출퇴근해야 했다. 덕분에 그 기간 동안 나는 1년 동안 160권이 넘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서울살이는 불가피한 시간으로 치르는 슬리피지(slippage)가 발생한다. '시간이 돈'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이 옳다면 서울의 슬리피지는 꽤 큰 셈이다.



슬리피지(Slippage) : 금융 거래에서 주문 요청 가격과 실제 체결 가격 간의 차이를 의미하며, 시장 변동성이나 낮은 유동성으로 인해 발생하여 거래에서 손실이나 손해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글)


서울에서 전부 혹은 일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생계를 위해 출퇴근을 해야 한다. 수백만 명에게 매일 주어진 저마다의 이동 시간은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일까? 아니면 유튜브, 소셜 미디어, 게임을 즐기며 그저 권태를 달래기 위해 시간을 죽이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지방에 산다면 대체로 이러한 출퇴근 시간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세권이라고 집값이 미친 듯이 비싸지는 현상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사는 이들보다 하루를 더 유용하게 쓰며 살아가는 것인가? 인간의 기묘한 점은 바쁠수록 더 많은 일을 벌인다는 것이다.


다시 서울을 떠나 KTX를 타고 돌아갔다. 종착역에 도착하니 얼핏 봐도 인구 밀도는 서울역의 1/5도 되지 않았다. 덕분에 얼마 기다리지 않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역에서 집까지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슬리피지가 없는 삶으로 돌아왔는데 조금은 아쉬운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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