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TV로 유튜브를 보다가 건너뛰기 버튼이 나올 때까지 강제로 광고를 시청한 무수한 사례 중 하나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한다. 내 흥미를 끈 광고에서는 '7세 고양이는 인간 나이 44세'라는 흥미로운 문구가 나왔다. 물론 광고의 정체는 고양이 사료였다. 그렇다. 내 나이는 고양이 7세와 크게 차이 나지 않은 셈이다.
고양이는 7세가 되면 중년 묘가 되어 각종 질병이 창궐한다고 한다. 인간 역시 30대를 지나 40대가 되면 마법처럼 건강검진을 하게 되면 종합 소견란의 글귀가 늘어난다. 특별한 건강 체질이 아닌 한 거의 예외가 없다. 나는 사실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가 아니라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은 기억이 난다. 잡지 연재소설의 주인공 고양이는 젊은, 아니 어린 축에 속한 고양이었다. 스포일러를 해서 미안하지만 젊음이 주는 호기심 혹은 혈기 때문인지 몰라도 부주의하게 집 한편에 있는 커다란 독에 든 물에 빠져 죽는다. 아마도 작가가 연재를 중단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아닐까?
젊은 나이에 요절한 고양이와 별수 없이 노화로 인해 고통받는 고양이의 삶, 무엇이 더 행복한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채로 죽은 작가가 남긴 청년의 사진이 부럽다고 했지만 그런 이유로 일찍 죽고 싶지 않다고 한 바 있다. 나 역시 자기 보존의 욕구인 코나투스(conatus) 때문에 선뜻 물에 빠지거나 비행기가 추락하는 갑작스러운 삶의 끝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오뒷세이아>에서 주인공은 늙어서 죽는 것을 소원한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기괴한 바람으로 보인다. 장수 리스크라는 말이 나올 지경인데, 늙어 죽는 게 꿈이라니! 하지만 전쟁과 비위생적 환경으로 평균 수명이 극도로 짧던 시절의 글이다. 오래 산다는 것은 한때는 전 세계 모든 이들의 꿈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겪는 노화의 현실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충격적인 첫 장면을 닮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어느 날 일어났더니 주름 가득한 갑충 모양의 벌레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변한 갑충을 좋아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경멸 때문에 던져진 사과는 갑충의 몸에 박혀 조금씩 썩어갔다. 이보다 앞선 그리스 신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납치한 미남 티토노스는 신의 은총으로 불사의 몸이 되었지만 노화는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이 흉측하여 여신은 그를 매미로 변신시켰다. 어쨌든 결말이 곤충인 점은 비슷하다.
이 글이 노인 혐오의 글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오랜 세월 함께 살았다. 그래서 노년의 쓸쓸하고 덧없는 삶과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편이다. 그저 허리둘레와 반비례하게 머리숱이 줄어들어 가는 중년 남자의 앞으로 다가올 노년에 대한 두려움을 담은 탄로가(歎老歌)이다.
7세 고양이도 자신의 삶이 불행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한 가지 사실은 잠이 많기로 유명한 고양이는 나이가 들면 수면 시간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이다. 보통 고양이는 12~15시간을 자는데 나이가 들면 16~20시간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불행히도 인간의 수면은 계속 줄어든다. 새벽 5시에 운동을 나가면 10명 중 9명 정도 비율로 노인들이 활발히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새벽부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노인들보다는 방 한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이 든 고양이가 부러울 따름이다. 글을 마치려다 생각해 보니 길고양이의 수명은 평균 3세 정도라고 한다. 7세의 고양이란 길고양이 입장에서는 귀한 삶이다. 나도 천천히 소멸해가는 남은 생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