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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Feb 24. 2023

지하철 잘못 탄 날



서울 지하철 플랫폼 전광판에는 종점이 표시되어 있다. 서동탄행, 인천행 이런 식으로 말이다. 친절히 음성 안내도 해주는데 초행길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잘못 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나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꼭 실수를 해서 1~2정거장 뒤에 내리곤 한다. 실수가 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전광판 안내문의 종점이 바뀌기 전에 타거나, 혹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탔을 때이다. 오늘은 전자의 경우인 것 같다. 


잘못 탔음을 인지한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막상 지하철에서 내리려고 하니 퇴근 시간 피크타임이라 사람들을 도저히 밀고 나갈 수 없었다. 별 수없이 다음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 역은 10년 전쯤 살았던 회사 합숙소로 썼던 아파트 근처라 고향에 온 듯한 정겨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 실수가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하철을 반대 방향에서 다시 타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바깥 정취를 바라보고 싶어 잠시 동네를 걸어 버스를 타러 갔다. 동네 풍경은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고 겨울의 마지막 바람은 매서웠다.


나는 공교롭게도 책을 두 권 들고 있었다. 한 권은 거의 다 읽고, 다른 한 권은 새로 빌린 책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남은 페이지를 마저 읽었다. 다른 책을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에 버스가 도착했다. 별것 아닌 욕심 덕분에 나는 과거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새로운 책 역시 집중하지 못했다. 무언가 제대로 감상하려면 온전히 집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내가 지하철을 잘못 탄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꼭 책을 다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불필요한 강박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실수가 빚어낸 찰나의 아름다움, 10년 전의 나로 착각할 수 있었던 지하철역의 소음은 사소한 번뇌를 잊게 하기에 충분한 값어치가 있었다. 가끔 지하철은 아무 생각 없이 타더라도 너무 자책하지는 말자. 완벽한 여행이 없듯이 완벽한 퇴근은 없는 것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여정도 크게 보면 여행이며, 나는 우연히 길을 가다 반가운 친구를 만난듯한 경험을 한 셈이다. 예전에 살던 곳과 익숙한 곳을 이어주는 버스에서 내렸다. 늘 애용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새로 집어 든 책의 제목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 우주론에 관한 책이다.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쓰는 탁월한 저자의 글을 기억하기에, 출퇴근 길에 또 다른 모험을 기대하며 읽어야겠다. 그의 또 다른 책 제목으로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우연히(그렇게 보이지만 필연적으로) 지하철역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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