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긍정적인 편

by pathemata mathemata

우울함의 정도는 신경과학(뇌과학)에 따르면 유전적인 경향성이 크다. 불행히도 나는 우울함의 정도가 큰 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어머니의 기대가 컸다. 전부 100점을 맞지 못해도 충분히 잘 본 시험이었지만 어린 나는 부끄러웠나 보다. 혼자 놀이터 그네에서 한참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간 유년 시절의 기억만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유년 시절, 학창 시절, 사회생활을 통틀어 친구가 드물게 있는 편이라 그러한 우울함을 호소하고 토로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이러한 자발적 고립은 우울감을 더욱 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를 하고 회사를 다니며 사회생활도 하고 결혼도 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비사교적인 내 성향을 일부 감춤으로써 가능했다. 아내의 성격도 나처럼 내향적이긴 해도 친구가 꽤 많았다. 결혼식 사진 속 친구들의 대부분은 아내의 친구들이었다. 내 친구가 너무 적어 일부는 내 뒤에 서서 포즈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 결혼 이후에 내 어두운 그림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울함과 이에 비롯되는 부정적 대화는 아내에게 악영향을 미친 것 같다. 결혼생활의 어려움이 있어 심리 상담도 같이 받아본 적이 있다. 그 때문에 내 태도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아내는 이후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타고난 성향임을 이해하면서 전보다 싸우지 않게 되었다.


나 역시 심리학이나 신경과학과 관련된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책에서 나온 방법대로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부정적인 성향을 떨어뜨리기 어려웠다.


물론 나의 부정적인 성향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불편함에 대한 개선을 추구함으로써 회사에서는 꽤 도움이 되었다. 업무제안만 수백 개를 했고 덕분에 몇 개 프로젝트도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승진도 늦지 않게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삶에 만족할 수 없다.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늘 뒤처져 있는 것 같아 지금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최홍만처럼 랫풀다운(lat pull down)을 135kg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시덥지 않은 인생, 이미 시작부터 끝난 싸움이 아닐까 두렵고 무섭다.




어느 날 아내의 신발을 사러 운동화 매장에 들렀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뇌성마비 장애를 안고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뇌성마비의 특성상 언어장애를 수반하였기에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문자로 적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문득 얼마 전 중국 상하이 여행에 갔을 때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에게 핸드폰으로 번역어를 보여준 적이 있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도 상대방에게 전할 수 없는 한국어라는 것이 상당히 먹먹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순간 나는 그녀의 지난 힘들었을 삶을 동정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신발에 눈길이 팔려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이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그녀의 아들이 아버지가 러닝을 할 때 필요한 신발을 사려고 한다는 설명을 점원에게 하는 것이 들렸다. 다행히도 아들은 아무 탈 없는 정상인으로 보였다.


순간 다시 소설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아버지가 매장에 같이 못 오는 이유에 대해 상상하였다. 이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는 정상인일까? 보통은 장애인들끼리 결혼을 많이 하니까 매장에 오는 것이 불편한지도 모른다. 그런데 러닝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이 가설은 마음 속으로 기각했지만 문득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끈으로 연결되어 마라톤을 뛰는 광경이 떠올랐다.


나는 직업이 선원이라 거의 해외에 계셨던 아버지를 두었다.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보상인지 몰라도 큰 기대를 안고 키우셨다. 반면 매장에서 본 이름 모를 그녀의 집안은 어땠을까? 자녀가 정상인 것에 만족할 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 아들은 지금 우울하기보단 행복할까? 혹은 장애를 안고 있는 어머니 때문에 우울한 삶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이 정말 미소인지, 아니면 안면 근육의 장애에 따른 경련인지 나는 모른다. 매장 직원들이 모자에 대해 시간을 들여가며 꼼꼼히 배려해 준 덕분인 것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아들과 남편을 위해 신발을 사러 나온 것은 그녀의 모습은 내겐 행복해 보였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도 샘물처럼 내 안에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도 기쁨과 슬픔을 나눌 친구가 많아질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행복은 누군가 날 조금 떨어져 우연히 바라보았을 때 타인의 눈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 내가 놓쳤던 그 행복을 말이다.




https://youtu.be/iLLB0elriL0?si=COV05-wcMQxxvb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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