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신은 인간이라는 필멸(mortal)의 존재를 질투한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이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사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과 대비되는 이야기다. <굿 플레이스(the Good Place)>라는 넷플릭스 드라마에서도 끝나지 않는 삶에 대한 고민을 재미있게 풀어나갔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힌두교에서는 이미 한 것 같다. 인도인들이 갠지스강을 오염시키며 화장을 하는 이유는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고 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덧없는 고민 아닐까 싶다. 시선을 잠시 현대 물리학으로 돌려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천체는 서서히 열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심지어 블랙홀마저도 서서히 증발한다고 스티븐 호킹 박사는 밝혔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영원한 것은 없다고 보인다.
인간은 과거부터 죽음을 경험론적으로 긍정하지만, 종종 영원한 삶을 가정한다. 그래서 인간은 필요에 의해 신과 사후세계를 창조해 수천 년간 유지되는 직업군을 창출했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동안은 죽음을 가정하기 어렵지만 노화에 따라 점점 기력을 잃어가기에 인간은 자신을 닮은 후손을 바라기도 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나의 자녀마저 감수분열로 인해 자신이 가진 유전자의 1/4만 물려줄 수 있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생명체의 종(種)의 수명 역시 평균적으로 400만 년 정도에 불과하다(사사키 아타루가 인간의 남은 380만 년을 이야기 한 이유). 다시 물리학의 세계로 돌아가면 시간의 흐름이란 환상을 걷어내면 그저 사건의 집합체일 뿐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코스모스에서 카오스로 돌아가는 것이다. 피부가 탄력을 잃어가고 주름이 늘어나는 것은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예견된 수순이다. 우리의 심장이 멈추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얼마 전 같이 근무했던 직장 선배가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일이 있어 잠시 방문했다. 반갑게 인사했는데 안 본 사이 머리가 반백에 가까워졌다. 나와 선배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으니 나에게 들이닥칠 흉조처럼 보였다. 선배와 헤어진 뒤 퇴근길에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탑승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찰나에 내 시선은 비슷한 어떤 중년 남성의 뒷모습, 듬성듬성한 흰머리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풍경 같았는데 그 모습이 정물(still life)처럼 감상하는 순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아내가 흰머리를 뽑아달라고 하는데 점점 손을 대기 난감해지는 기억을 마주하게 된다.
이제 흰머리와 함께 다가올 모든 수고로움을 긍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옴을 직감한다. 영생을 얻었지만 젊음을 얻지 못한 나머지 매미로 변신한 티토노스처럼 삶이 영원하지 않은 것에 조금은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