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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Jul 09. 2023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허세가 많은 사람이다. 명품이나 SNS, 해외여행, 문신, 가오 등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의미와 달리 딜레탕트에 가까운 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나와 비슷한 작가의 취향이 극명히 드러나는 소설이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작중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아마도 하루키의 분신과 가깝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덕분에 기숙사에서 친하게 된 알파메일 나가사와 선배는 사후 30년이 안 지난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2년 정도 모자라지만 예외는 있는 법)


사실 나도 비슷한 맥락으로 베스트셀러인(지금은 스테디셀러인) 이 책의 유행에서 비껴나갔다. 그리고 이 책을 우연히 펴들게 되자 와타나베가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 대학 신입생 시절의 자신을 반추하는 글임을 밝히는 서문이 등장한다. 어쩌면 중년이 되어버린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인간인지라 글에도 나이가 느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작성일 현재와 독자가 동년배가 될 수 있는 것은 독서의 무한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노르웨이의 숲>은 <상실의 시대>라는 타이틀로 90년대 대한민국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나 역시 제목을 마음대로 출판사가 바꾸는 것을 영 마뜩잖게 생각하지만, 상실의 시대는 꽤나 근사한 제목이긴 하다. 한글판 제목이 내용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스포일러인 것 같다. 많은 등장인물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자살 등으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인공이 그토록 많은 죽음을 빠르게 경험하고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주인공인 나(와타나베)를 제외한 키즈키와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키즈키와 나오코, 나는 과거의 삼각관계이고, 미도리, 나오코, 나는 현재의 삼각관계이다. 이 두 삼각형의 공통분모는 나오코인데, 죽음과 삶을 모두 경험하는 비극적인 영웅 오르페우스 같은 인물이다. (자살한) 키즈키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뒤를 돌아본 것이다.  


나오코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는 와타나베를 받아들이는데, 그 이유는 미도리 역시 삼각관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도리의 남자친구를 포함하면 삼각관계는 앞서 언급한 것까지 3개를 이루게 된다. 마치 헤겔의 원환(의 원환)처럼 인물과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얽힌다. 그리고 즉자대자적으로 나오코는 자살하며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한 레이코는 바빌론의 창녀*처럼 나오코를 대신하여 와타나베와 섹스를 한다. 이는 최종의 삼각형(원환)이다. 와타나베-나오코-미도리(즉자)는 와타나베-레이코-미도리(대자)로 잠시 바뀌었다가, 와타나베-미도리(즉자대자)로 최종 진화한다.

 * 신(神)과의 교합, 신성한 매춘을 의미한다.


이 소설은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 비해 자전적인 소설이다. 젊은 날 우연히 맞이하게 된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을 성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죽음(타나토스)과 리비도의 관계, 라캉의 향락(주이상스)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연어가 고통이 마비된 채로 강물을 거슬러 산란을 하는 것처럼 대체로 죽음과 성은 맞닿아 있다. 


작가의 또 다른 분신(혹은 워너비)인 나가사와 선배가 날리는 후반부의 대사(아래 참조)는 꽤나 인상 깊다. 아마도 나(와타나베)는 소설 속에 묘사된 강박적일 정도로 규칙적인(25년간 마라톤 연습을 한 하루키처럼) 삶을 통해 감상적인 죽음을 극복한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 자신을 동정하는 것은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다."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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