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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Jul 03. 2024

노인을 위한 급발진은 없다.

시청역 사고를 확률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그랜트 카돈의 베스트셀러인 <10배의 법칙>에서 저자는 '당신이 모든 일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뒤에서 차를 누군가가 들이받았더라도 말이다. 피해자 행세(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대신 추돌사고의 가능성을 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매 사건마다 나타난다. 앞서 사례와 정반대로 뒤에서 차를 받은 피의자가 갑자기 뒷목을 잡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금년 7.1일 참혹한 역주행으로 9명의 사망자를 낸 시청역 사고를 생각해 본다. 역주행을 한 엄청난 과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자는 역시나 진실된 반성이나 사과는 쏙 빼놓고 급발진을 주장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은 40년 버스기사로 운전 경력을 가졌다고 진술했다.


급발진(急發進, Sudden unintended acceleration)은 차량이 운전자가 의도하지 않은 급가속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미국에서 토요타 케이스 1건 외 인정된 적은 없다. 사실 급발진 자체가 쉽게 일어날 수 없는 팻테일 리스크(Fat Tail Risk), 2008년 금융위기 급 블랙스완(Black Swan)이다.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리콜센터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신고 사례 통계(국민일보)
교통안전공단은 급발진 신고 건과 관련해 “운전자 페달 오조작, 매트에 의한 페달부 끼임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 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차량 결함에 따른 급발진은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 등 일부 선진국에서는 급발진을 제작결함 중 하나로 구분하고 있지만 실제 공식적으로 급발진 사고가 인정된 건 세계적으로 단 한 번뿐이다.
[출처] 교통사고 단골 멘트 된 ‘급발진’… 매년 신고자 수십 명, 국민일보 2024-07-03


급발진인지 아닌지는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정밀감식을 통해 최종적으로 판단하겠지만 그의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 추정해 볼 수는 있다.


먼저 노화에 따른 인지능력 저하이다. 인간의 의사 결정 능력은 점진적으로 쇠퇴한다. 특히 처음 보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떨어진다. 피의자는 택시가 아닌 버스기사였고, 사건 장소는 초행길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의사 결정 능력을 평가하는 두 번째 방법은 유동성 지능(流動性知能, fluid intelligence)과 결정성 지능(結晶性知能, crystallized intelligence)을 측정하는 것이다.

 유동성 지능은 처음 보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유동성 지능을 평가할 때는 미리 학습하지 않았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풀게 한다. 예컨대 공간 시각화 능력, 작동 기억(working memory: 정보를 일시적으로 저장하고 다루는 능력), 열거된 숫자에서 빈칸 채우기 등을 평가한다. 예를 들어 다음에 열거된 숫자의 빈칸을 채워보라. 1, 5, 6, 10, 11, 15, ( )? 답은 16이다.

결정성 지능은 학습을 통해서 축적된 지식을 사용하는 능력이다. 결정성 지능을 평가할 때는 어휘, 지리, 역사 지식을 측정한다. 일반 지능 검사에서는 유동성 지능과 결정성 지능을 모두 측정한다.

유동성 지능은 20세 무렵 정점에 도달한 후 평생 계속해서 꾸준히 하락한다. 예컨대 20대 초에는 유동성 지능 점수가 성인 평균보다 표준편차 0.7이 높지만 80대 초가 되면 성인 평균보다 표준편차 1이 낮아진다. 20세가 넘으면 해마다 약 1% p 하락하는 것이다. 즉 25세에 유동성 지능 점수가 상위 30%였던 사람이 65세가 되면 상위 70%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출처] 마이클 모부신 운과 실력의 성공 방정식


다음으로 통계이다. 미국에서 조사한 운전자 연령에 따른 급발진(조작 실수 포함)은 운전경력이 미숙한 어린 나이뿐만 아니라 노인인구에서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인지능력이 저하되는 객관적 사실이 있는데 피의자는 자신의 운전경력만으로 인지능력 저하를 막을 수 있었을까?

thetruthaboutcars.com


인간은 자기 정당화(합리화)의 동물이다. 하지만 예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 급발진이 기계적 결함이었더라도 역주행한 사실이 바뀐 것은 없다. 역주행이 없었으면 끔찍한 대형사고는 없었을 것이다.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오로지 급발진이 문제가 되었더라도 사망 유가족에게 사죄가 우선일 것이다. 문득 칸트의 묘비명이기도 했던 아래의 문구가 떠올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 그것이다.  [출처] 실천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이미 초고령사회(UN의 정의에 따르면 만 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인 사회)를 맞이한 대중에게는 피의자는 이웃집 노인이기 때문에 '약자가 선하다'는 언더도그마로 부합할지 모른다.


만일 그가 죽인 9명의 피해자 중 미성년자, 여성, 장애인, 노인이 있었다면 지금의 여론은 마냥 가해자 편이었을까? 사망자가 공교롭게도 30~50대 성인 남성들이라 피의자는 당당하게 급발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는 달의 뒷면처럼 반쪽 짜리 진실이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들에게는 사고 그날처럼 종종 야근하면서 힘들게 부양한 미성년 자녀, 배우자, 부모가 있었다. 이들의 가정과 미래를 피의자는 어처구니없는 역주행으로 한순간에 난도질했다.


피터 드러커는 지구 온난화 같은 사건을 '이미 일어난 미래'라고 말했다. 초고령사회 또한 초저출산의 피드백을 받아 멈출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2022년 교통사고 사망자수에서 노인운전자가 가해자였던 비율은 100명 중 27명에 달했다.


특히 지난해 노인운전자가 가해자인 교통사고의 사망자수는 735명으로 전년보다 3.7% 증가했다. 지난해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6.2% 감소한 것과는 반대 흐름이다. 부상자수도 지난해 전체적으론 전년대비 3.4% 감소했지만 노인운전자 가해 부상자는 10.2% 상승했다.

지난해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수에서 노인운전자가 가해자였던 비율은 26.9%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기준 교통사고 100건당 사망자수는 1.39명, 노인운전자는 2.12명이었다.

노인운전자가 낸 교통사고가 인명피해 위험이 크다는 뜻이다.

전체 교통사고 건수, 사망·부상자가 줄어드는 가운데 노인 운전자 사고는 되레 늘어나는 것은 이 연령대의 운전자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전체 면허소지자는 연평균 2.5% 증가했지만 65세 이상 운전자는 매년 11.2% 증가했다. 지난해 전체 면허소지자 중 만 65세 이상은 12.9%를 차지한다.

65세 이상 운전면허증 소지자는 2017년 279만여 명에서 지난해 438만여 명으로, 5년 새 약 1.6배로 늘어났다. 2025년엔 498만명, 2035년엔 1천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운전면허가 있다고 해서 모두 운전대를 잡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양(+)의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고령사회에 접어든 한국에서 노인운전자의 교통사고 역시 증가할 공산이 크다.

[출처] 지난해 노인운전자 교통사고 3만4천여건…역대 최고치, 연합뉴스 2023-09-17



노인 운전사고 비율은 앞으로도 노인인구 증가에 따라 양의 상관관계를 가질 것이며, 급발진을 주장하는 노인의 탈을 쓴 무뢰한들도 비례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제도적으로 노인 운전에 대한 합리적 제한이 필요함과 동시에 피의자는 자기 정당화를 멈추고 사죄하는 양심이 필요하다. 더 이상 피의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인지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은퇴한 운동선수가 여전히 존중받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신체와 정신력의 저하를 오롯이 부정하고 무리한 운전 끝에 인명 사고를 낸 것은 미필적 고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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