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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Jul 22. 2024

약속

백일장 탈락 기념 셀프투고


약속은 인류 사회를 문명으로 이끌어낸 근간이다. 약속은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종잇 쪼가리에 불과한 지폐를 교환의 수단으로 만들어내는 마법을 일으켰다. 만일 어떤 이들이 서로가 지키고자 약속한 합의에 대해 파기한다면 사회는 그에 합당한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 따라서 약속의 불이행은 인간에게 있어 사회에서 영구 격리될 수 있는 위험을 주기에 개인은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놓인다. 토마스 홉스를 비롯하여 근대의 사상가들은 국가와의 계약론을 바탕으로 사회를 설명하였다. 이는 마치 국가가 원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진화론적으로 사인(私人) 간의 합의 혹은 약속이 개인-국가라는 주체로 약속의 대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대체로 비슷한 삶을 고대로부터 영위해 왔다. 수천 년 전의 삶에도 국가는 존재했으며 사회 구성권들의 약속, 신의칙은 존재했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스>에도 아카이아(고대 그리스)가 일리오스(트로이)를 침공한 것은 파리스가 저지른 부당한 결혼계약의 파기 때문이었다. 이후 전장에서 비정한 청동의 칼날로 서로를 살육하지만, (현대의 제네바 협약 이전에도)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전쟁의 규칙은 존재하였다. 이렇듯이 약속은 인간이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자신의 조상을 기억할 수 있는 날 이래로 비슷하게 지켜져 왔다.



그런데 약속 중에 유독 잘 이행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와 친한 이들, 가족과의 약속일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은 고대 로마시대의 가부장제 사회처럼 아버지가 자식의 생살여탈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은 어쩌면 현대사회에 있어 가장 최후의 보루라고 지킬 가치가 있는 최소 사회 구성단위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이러한 법적, 사회적 강제성이 없는 것이 주요 특징인데 전근대 사회에서는 유교적인 법칙이 이를 대신해 왔다. 여기서 말한 유교적이라는 의미는 공자가 말한 '때리는 아버지가 있다면 맞지 말고 도망치라.'는 논리와 같다. 이는 가부장인 아버지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어느 정도 작동하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이러한 가정 안의 불법은 점차 사회가 서구화되어 감에 따라 아동학대방지법이 가정에까지 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이제 가정 또한 국가의 지배를 일정 부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가정에서 '반보성의 법칙'에 따라 '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그 말은 곧 자신의 노후를 포기하면서까지 자녀 양육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대가를 무의식적으로 바라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약속은 아니지만, 훗날 자녀가 일정 수준 경제적 자립을 이루게 된다면 부모의 봉양에 일부 책임을 질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피드백 관계는 21세기 들어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면서 인플레이션 증가율 대비 실질 임금 상승률이 낮아져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이 되었다. 이제 부모와 자녀의 대가 관계는 일방적 헌신으로 포장될 일만 남아있다. 이전에는 효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미래세대의 기성세대 부양은 국가가 나서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 재정정책을 통해 강제로 시행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관계에 있어 남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지는 순수한 부양의무뿐이다. 바꿔 말하면 모는 자식을 부양하지만 자식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없다. 따라서 노년의 대비를 위한 부양을 기대할 수 없고 오히려 노년이 위태로워지기에 결혼과 출산을 통해 가족을 만드는 것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음(negative)의 피드백 효과로 인해 세계 최저 출산율로 치닫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약속은 대부분 국가로 이전되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친구가 남긴 하지만, 친구관계 역시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비슷한 궤적을 밟고 있는 사람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국가는 초등학교부터 고등 교과 과정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을 의무교육을 받도록 강제하는데 이로 인해 만나게 되는 인간관계가 대부분이다.  이후 사회생활이나 취미로 만나게 되는 인간관계는 그 유통기간이 대체로 짧은 편이다. 소속감이라는 브랜드가 앞서 말한 국가가 부여한 조직에 비해 약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회사에서 일하거나, 회사(혹은 작은 가게)를 세운다. 국내 노동인구 중 약 3/4의 사람들은 회사원으로 일하고*, 1/4만이 사장님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이들의 사업장은 5년 내 절반이 폐업하는 적자생존**의 공간이다. 회사 밖은 정말 지옥인 것이다.


* 8일 OECD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22년 기준으로 국내 근로자 2천808만9천명 중 자영업자 등 비임금근로자는 658만8천명으로 23.5%에 달했다. - 한국 자영업자 등 비임금근로자 비중 23.5%…OECD 7위(연합뉴스, 2024.1.8)


** 1일 서울 신용보증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 소상공인의 5년 생존율은 54.7%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 소상공인 2곳 중 1곳은 창업 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업하는 셈이다. - 자영업자 벌벌 떨게 하는 ‘5년내 절반’ 폐업…폐점률 낮은 곳은 ‘어디’ (매일경제, 2024.5.1)


 회사원들은 국가와 유사한 관료제를 가진 회사의 사규에 따라 계약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진정한 우정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 회사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지만 평가, 승진 등 분명한 이해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방법 역시 회사 내의 법칙이다. 고용계약서는 회사와 종업원 간의 약속이지, 종업원 간의 상호계약은 아니다. 회사는 하나고 회사원은 다수지만 이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연대할 수 없다. 이를 해결하고자 생겨난 노동조합 역시 수평적이지 않고 관료제를 띄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남은 한 가지 약속의 기대가 남아있다. 이 기대는 국가의 강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부모의 기대, 회사와 주변 동료의 심리적 압박과도 무관하다. 바로 '자신과의 약속'이다. 어쩌면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강제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아침마다 5km를 달려서 1개월 만에 체중 감량에 성공하겠다고 약속한다고 하여 그 결과를 기대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약속을 이른 새벽마다 되뇌며 침대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신발 신기에 성공까지 했다면 된 것이다. 1개월 후 주변 사람들이 몰라보게 살이 빠졌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행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약속에는 대가가 없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타인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은 형법상 절도죄의 구성요건에 타인이 점유한 물건을 가져가면(이탈하면) 처벌하기 때문이고, 이는 감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와의 약속(계약)에는 비정함이 자리 잡고 있다. 고대의 전장에 용맹했던 군사들도 등을 보이면 아군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채무 미상환은 19세기 이전에는 감옥에 가야 하는 처벌을 받았다. 회사를 마음대로 출근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근한다. 정리하자면 약속의 불이행의 대가로 감옥 혹은 이와 유사한 신변에 위험이 강제된다면 문명이라는 세상으로 세상으로 바뀌어 갔다는 증거이다. 즉, 대부분 인간의 약속은 대체로 강제성의 수단을 위해 생겨났다. 그러나 나와의 약속에는 그러한 처벌 항목이 없다. 물론 구태여 만들 수 있겠지만 이행 강제성은 없다는 점은 역시 동일하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동하는 죄수가 아니라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정하는 것도, 파기하는 것도 자유이다. 자신이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자 입법가로서 자신을 다스리는 자에게 어떤 이가 멍에를 씌울 수 있겠는가?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약속의 굴레를 씌워라. 그리고 대가 없이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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