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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명필가인가?

by 윤슬

이 글의 제목만 본다면 오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혹시 추사 김정희는 명필가가 아니라는 건가, 라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사는 명필가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는 명필가‘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으며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창의성 넘치는 예술가였고 실학자였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최고의 정보통이기도 했지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정보 중 가장 익숙한 것은 김정희의 서체, 즉 추사체일 것입니다. 그는 글씨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지요. 그의 글씨는 때론 괴이해 보이고 때론 너무 거칠어 보이거나 혹은 장난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추사체의 진정한 미적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21세기에도 여전히 추사 김정희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나아가, 추사 김정희의 넓고 깊은 학문과 예술세계를 탐방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김정희의 서체 즉 추사체다. 그의 글씨는 때론 귀해 보이기도 하고 때론 너무 거칠어 보이거나 혹은 장난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추사체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추사 김정희에 대해 오래 연구한 전문가들은 말한다. 추사체는 얼핏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다고. 추사의 글자 하나하나가 상황이나 문장, 내용에 따라서 바뀌기 때문이라고. 또한 그것이 끊임없이 변화를 거치며 실제로는 정형화돼 있지 않아서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추사체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그 탄생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추사 김정희가 살아온 시대와 그의 삶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하나의 유행이 있었다. 그것은 청의 세련된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는 흐름이었다.

이른바 북학이다. 북학의 유행과 함께 연행, 즉 청나라 연경으로 여행 가는 것이 조선 지식인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이는 견문과 시각을 넓히기 위한 일종의 단기 유학 코스 같은 것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19세기 연행과 북학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김정희에게 연행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는 당시에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한다. 그리고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 군관 자격으로 연행길에 오른다.


연경에서 그는 오랫동안 흠모해 왔던, 청나라 최고의 석학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 특히 옹방강은 나이 80세에 가까운 대학자였지만 조선의 젊은 선비 김정희의 학문적 깊이에 감탄해 즉석에서 사제 관계를 맺는다. 추사는 평생에 걸쳐 청나라 지식인들과 편지를 통해 학문과 정보를 교류했다. 그래서 조선의 서재에 앉아서도 중국의 신조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 금석학자, 김정희


연행을 다녀온 추사가 새롭게 눈을 뜨게 된 학문이 있었다. 바로 금석학이다. 금석학이란, 비문학(碑文學), 즉 비석에 쓰인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자소를 식별하고, 그 의미를 명확히 하며, 날짜와 문화적 맥락에 따라 그 용도를 분류하여 글과 작가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는 학문이다.


김정희는 옹방강과 그의 아들 옹수곤과 계속 교류하며 금석학에 눈을 뜨게 된다. 옹수곤은 조선의 금석문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추사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추사는 금석학 연구의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던 1816년 7월 어느 날 김정희는 친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 어느 비석 앞에 선다. 그때까지 ‘무학대사비’ 또는 ‘도선국사비’로 알려진 비석이었다. 두 사람은 비석의 이끼를 한참 동안 문지른다. 그러자 희미한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글자들의 탁본을 떠서 연구를 시작한다. 1년 동안 연구한 결과 그것은 ‘진흥왕 순수비’였다. 이는 곧 신라시대 진흥왕이 그곳까지 땅을 넓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은 당대의 역사책에서 누락된 사실이었다.


이때부터 김정희는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고 역사에서 누락된 사실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금석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 발견. 이는 금석학 연구자 김정희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중국의 금석학자들 사이에서 김정희는 조선 금석학을 연구하는 통로이자 중심이 된다. 이후 추사는 또 다른 명비 하나를 찾아낸다. 경주에서도 심신 산골에 있는 암곡동에서 ‘무장사 아미타불 조성기비’를 발견한 것.


‘무장사비’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도 매우 큰 가치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무장사비에 쓰인 글씨체가 ‘황희지체’이기 때문이다. 김정희의 스승 옹방강은 왕희지의 글씨를 연구를 오랫동안 해왔다. 그런데 왕희지의 글씨가 당시 신라까지 전해져서 비석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큰 자극을 받은 옹방강은 조선 금석문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해동비고

추사는 자신이 발굴하고 판독해 낸 옛 비문 7점을 옮겨 적고 이를 분석해 <해동비고>라는 논문집을 낸다. 사실 추사는 수많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지만 현재까지 남겨진 저서는 별로 없다. 유배 시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자신이 쓴 책들을 거의 다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해동비고>는 김정희의 매우 드물고 귀한 저서다. <해동비고>에는 7개의 금석문에 대한 연구가 들어있다.










김정희의 인장들

금석학은 고증학의 한 분야다. 김정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확실하게 고증하고 증거 남기기를 좋아했다. 그러한 성향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그의 각기 다른 수많은 인장들. 이러한 인장들 때문에 김정희에게 100여 개 이상의 호가 있다는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는 왜 자신이 교정을 봤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장으로 찍어서 남겼을까?

그전까지 조선에서는 도장을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김정희 시대에 오면서 비로소 도장이 사용된다. 이것은 ‘김정희가 읽은 책이다’ 또는 ‘교정을 본 책이다’라는 일종의 고증학의 증거로 남긴 것이다. 김정희가 조선의 인장 문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추사체 역시 김정희가 금석학을 연구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즉 오랫동안 서법에 대한 고증을 하면서 이를 통해 추사체가 창조된 것이다. 글씨에 대한 그의 재능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여섯 살 때 입춘대길이란 글씨를 직접 써서 대문에 붙였다. 그런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나가다 이것을 보고 그 비범한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글씨로서 대성하겠으나 그 길로 가면 인생행로가 몹시 험할 것이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하시오”라고.

채제공의 예언은 사실이었다.


암행어사, 김정희


김정희에게는 뜻밖의 이력이 있다. 바로 암행어사를 지낸 적이 있다는 사실. 41세에 충청도 지역에 암행어사로 갔는데 당시 관리들에게 수탈을 당하고 있던 백성들의 처지를 바로 잡아주기도 했다.

이때 김정희는 암행어사로서 충청도 비안 현감이던 김우명의 실정을 발견해 파직시켰는데, 이는 훗날 그에게 모진 시련을 안겨준다. 안동김 씨 세력의 모함으로 제주도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때 그를 중죄인으로 엮어 상소를 올린 이가 바로 안동김 씨 집안의 김우명이었던 것.

그때까지 거침없이 출세가도를 달리던 김정희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위리안치된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의 학문과 글씨는 깊이를 더해간다. 고독과 절망이라는 토양에서 오히려 예술혼이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이다. 게다가 그는 유배지에 갇혀서도 중국 학계의 새로운 동향을 파악하고 신간 서적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제자 이상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적은 직업이 역관이었지만 시문에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상적은 중국에 상당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서 김정희와 중국 친구들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특히 이상적은 중국의 신간 서적들을 계속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오직 책을 벗 삼아 지내는 추사에게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1844년, 이상적이 여느 때처럼 스승에게 무척 귀한 최신 서적 한 질을 보내준다. <황조경세문편>이라는 책으로 총 120권, 79 책이나 됐다.

제자의 그 정성에 감동한 추사는 어떻게든 그 고마운 마음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것조차 변변치 않은 유배지에서 보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붓을 들고 그림 한 점과 함께 이상적에게 편지를 쓴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세한도’다.


세한도.jpg 세한도


창문 하나만 있는 단순하고 허름한 집 한 채 거칠고 앙상하게 마른나무 네 그루. 이것이 누구나 한 번쯤 보았지만 아무나 평할 수 없는 그림 세한도다. 조선 문인화의 최고봉이자 추사 예술의 결정판 세한도는 추사를 이해하는 핵심 통로다.

집 하나와 소나무 몇 그루. 세한도의 그림은 썰렁한 편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읽어내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이때 보는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세한도를 보고 앙상한 고목들이 서로 가까이 있는 모습에서 김정희와 이상적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심리를 읽어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금방이라도 화폭으로부터 쓸쓸한 겨울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세한도를 추사는 한여름에 그렸다는 사실.

세한도와 같은 그림을 문인화라 한다. 전문 화가가 아닌, 문인들이 취미로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문인화에서 그림은 그림이라기보다 시에 가깝다. 따라서 그림 자체보다 작가의 심리를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림을 경시했고 화가를 백안시했다. 하지만 추사는 달랐다. 그는 그림을 하나의 학문으로 여겼다. 이처럼 추사는 학문과 예술이 합치된 세계, 즉 ‘학예일치’를 추구했다. 무엇보다 추사는 학문의 수단이었던 글씨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한편, 세한도를 받아 들고 감격한 이상적은 이를 청나라에 가져가 중국 학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자 세한도의 그림과 글을 보고 감동한 16명의 학자들은 저마다 찬사의 글을 써준다. 그것이 세한도의 본문보다 긴 제영들이다.


추사체의 완성


오랫동안 다양한 서체를 선보였던 그는 제주도 유배 시절에 비로소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완성하게 된다. 이에 관해 제주도 추사박물관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의 강한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다 늘어지고 비틀어졌죠. 바다는 맑고 깨끗한데 파도가 너무 강하고, 돌담들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습니다. 이 모든 자연환경을 보면서 추사의 글씨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라고요.

또 다른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 유배 시절, 할 일은 없고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니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쓰다 보니 저절로 창의성이 생겨난 것 아닐까라고.


추사 글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계산무진(溪山無盡)’ (간송미술관 소장)

이에 관해, 다시 제주도 추사박물관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어느 날 추사가 제주도 단산을 보고 너무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바로 뫼산자구나. 그가 어렸을 적에 배웠던 뫼산자는 가운데 봉우리는 항상 높고 좌우의 봉우리는 낮은 것으로 배웠었는데 이곳의 단산을 보니까 봉우리 세 개가 일정하게 같아 보인다는 거예요. 뫼산자도 저렇게 쓰면 참 글씨가 아름답겠구나 해서 바로 추사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편 제주도에는 추사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향교가 있다. 유배지에서까지 그는 후학들을 양성했다.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추사의 유배지까지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그에게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물어 물어 제주도 대정 향교까지 찾아간 것이다.

9년 동안의 유배에서 비로소 벗어난 추사는 그 후 북청으로 1년 더 유배를 다녀왔고 이후 말년을 과천의 작은 초당에서 보낸다.


대팽.jpg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


이 무렵 추사가 남긴 명작 중에는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라는 글씨가 있다.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 손녀라는 뜻이다. 이 짧은 글에서 인생에서 평범한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달은 노인의 지혜가 엿보인다.


봉은사김정희서판전.jpg 봉은사 현판


특히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병환 중에 쓴 마지막 글씨야말로 추사체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봉은사 현판 글씨인데, 얼핏 보면 어린아이가 쓴 것 같고, 아무렇게나 대충 쓴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70년 동안 그 분야에 용맹정진한 후 모든 경계를 넘어선 장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씨다. 이를 보면, 노자의 명언인 ‘대교약졸’ 즉 ‘훌륭한 기교는 오히려 졸렬해 보인다’는 뜻을 실감하게 된다.


옛것에 바탕을 두고 늘 새로움을 추구했던 수사. 김정희. 그는 학인이자 예술가였다. 이렇게 추사에게 가서 학문은 예술이 되었고 예술은 학문이 되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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