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오늘의 스토리는 어쩌면 많은 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생략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제가 이 다큐 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우리 조상들의 '기록에 대한 사랑'에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았던 것이 생각나서 독자 여러분께서 잘 아시더라도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한민족은 유난히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 특히 우리 조상들에겐 앎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지식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 열정으로 왕에 대한 세계 최장의 기록을 남겼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했으며, 천년을 가는 목판 인쇄물을 만들어냈다. 기록물을 통해 정신문화의 꽃을 피워낸 것이다. 세계가 인정한, 우리나라 기록 유산들의 깊고 넓은 정신세계를 탐방해 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기록의 나라였다. 특히 꼿꼿한 선비 정신을 추구했던 조선은 수많은 기록유산을 남겼다. 인류 역사상 단일왕조의 역사서로서 가장 길고 가장 공정한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따라다니며 마치 비디오 기록물처럼 남긴 승정원일기. 국가의 모든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과 함께 기록한 조선왕조의궤 등에서 우리는 조선 지식문화의 정수를 읽는다.
물론 조선시대 이전에도 기록문화는 살아 있었다. 지방의 한 사찰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직지심체요절. 그리고 불심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고려인들의 의지를 새겨 넣은 고려대장경판. 우리는 이러한 유산들에서 찬란했던 고려왕조의 정신문화를 읽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상에 무서운 것은 사관뿐이다.”
이는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이 남긴 말이다. 연산군조차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사관은 임금이 무슨 말을 하든, 어디서 무엇을 하든, 24시간 옆에 붙어 다니며 모두 다 기록했다. 하지만 임금은 자신에 대한 기록인데도 이를 절대 읽어볼 수 없었다. 그만큼 당대 최고 권력자의 견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 바로 실록이다.
실록에는 사실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관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당대의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인물들에 대해 평가를 한 것도 있다. 이때 사관들이 소신을 갖고 공정하게 기록을 하기 위해서는 외압이 없어야 했다. 만일 국왕이나 권력자들이 실록을 들여다본다는 것을 안다면 공정한 기록이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공정한 기록을 담보하기 위서 국왕이나 집권자들 그 누구도 실록을 보지 못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궁중에서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일까지 중요한 것은 모두 기록했다. 광해군 1년 9월 25일 자에는, 강원도 전역에서 미확인 비행물체 즉 UFO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가 하면, 세종대에는, 세 쌍둥이를 낳은 노비에게 곡식을 하사했다는 사실도 적혀 있다. 마치 오늘날 지자체의 출산 장려금과 같은 것이었다. 이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관례였다. 지금도 힘들지만 그 당시 세 쌍둥이를 낳는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그 노고를 치하해서 쌀 10석을 하사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인들뿐만 아니라 천민인 노비에게도 쌀을 하사했다.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기록 유산인 승정원일기는 여러모로 실록과 비교된다. 승정원이란,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 격이다. 승정원일기는 바로 이 승정원의 업무 일지.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대가 끝난 후 다음 왕대에 전 왕조의 기록 중에서 후대에 꼭 전할만한 내용들을 선별해서 정리한 일종의 편집 자료이다.
그와 달리, 승정원일기는 그 당대의 기록이다. 실록은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사고에 보관되지만 승정원일기는 일종의 국정 참고용 자료였다. 왕도 볼 수 있었고 신하들도 국정을 운영하는데 참고할 필요가 있을 때 볼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를 기록한 주서들은, 정확한 문장력과 함께 속기 능력, 그리고 우리말을 즉석에서 한자로 바꿔 쓰는 동시 번역 능력까지 갖춰야 했다. 승정원일기의 꼼꼼하고 치밀한 기록은 실록을 뛰어넘는다. 예컨대, 매일매일의 날씨를 맨 먼저 기록했는데, 이때 비만 해도 그냥 비라고 하지 않고 소나기, 이슬비, 보슬비 등 약 8가지 종류로 분류해 적었다.
이처럼 기록문화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승정원일기는 3245 책, 글자 수만 해도 2억 4천여만 자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 기록물이다.
조선왕조의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또 다른 귀중한 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조선왕조의궤다. 의궤는 왕실과 국가의 주요한 행사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길례, 빈례, 흉례, 그리고 제례, 가례 등이 그것이다. 전 세계에서 의궤를 만든 나라는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밖에 없다. 조선왕조가 이처럼 의궤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왕실에서는 1년에 몇 번씩 똑같은 패턴의 행사를 치렀다. 그래서 행사 진행에 관한 모든 내용을 기록해 놓아서 행사를 치를 때마다 참고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이 탄탄해지고 예산 낭비도 줄일 수 있었다. 현대에 와서도 조선 왕실의 행사 등을 복원할 때 이러한 의궤를 참조한다.
그중에서도 왕과 왕비의 결혼식을 그린 가례도감은 그 내용이나 그림의 표현이 무척이나 상세하고 치밀하다. 가례에 참석했던 인원 수와 담당했던 역할은 물론 행사에 사용된 사소한 물건들의 재료까지 일일이 다 기록해 놓았다.
현존하는 의궤류는 637종으로 규장각, 장서각, 그리고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등에서 소장해 왔다. 이 중 외규장각 의궤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돼 파리국립도서관이 보관해 왔었다. 그러던 지난 2011년, 외교부 등의 끈질긴 노력으로 145년 만에 외규장각 의궤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고 영구 임대 형식으로 반환됐다.
직지심체요절
청주에 위치한 고인쇄박물관. 이곳에는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 직지심체요절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아니다.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직지 상권 복원본과 하권의 영인본이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직지가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이 되었을까? 바로 책의 가장 뒷면에 쓰여있는 발행기록. 선광 7년 정사 7월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인시. 즉 1377년 7월 청주목 교외에 있는 흥덕사에서 주조한 활자로 인쇄했다는 뜻이다.
이 사찰의 승려들이 벌집에서 추출한 밀랍으로 어미자를 만든 후, 쇳물을 부어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지방의 어느 이름 없는 절에서 만들어낸 금속활자가 인류의 인쇄기술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 시대에 목판 인쇄가 아닌, 금속활자 인쇄가 발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목판본 같은 경우에는 제작에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기 때문에 한 책의 많은 양을 찍을 수 있지만 다양한 책을 찍을 수는 없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다양한 책들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금속활자 인쇄술이 당시 가장 적합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세계의 학계에서는 직지가 아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인류의 문명 발전에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친 발명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당시 유럽의 평범한 시민들도 성경을 읽기 원해서 그러한 욕구를 반영해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찍어서 보급했고 덕분에 민중에게도 널리 지식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반면, 우리 조상들은 중앙 정부의 정책을 수행하거나 일부 귀족층을 위해 책을 간행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독점적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했다.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문자가 보급되지 않았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당시의 권력층이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식을 독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그들보다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했음에도 세계사적인 의미를 거두지 못했다.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눠진다. 먼저 글자본을 만든 후 원형을 만들고 주조 작업을 거친 후 마무리 작업을 한다. 주조기법에 따라서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활자 하나하나를 밀랍으로 만드는 밀랍주조 기법. 다른 하나는 모래로 주물틀을 만드는 모래주조 기법이다. 금속활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특히 1,200도의 쇳물을 다루기 때문에 자칫하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청동을 녹여 다양한 주물들을 만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금속활자는 당시의 과학기술을 총망라한 종합 예술품으로, 우리 민족의 인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고려 시대에 금속활자는 물론 목판 인쇄술 또한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바로 저 유명한 고려대장경판이 그 증거. 이는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 고려인이 불심으로 뭉쳐 만들어낸 역작이다. 사회 지배층과 이름 없는 백성들까지 한 마음으로 제작한 고려대장경판은 천년의 세월을 견디도록 제작했다. 대장경은 그 당시 이루어졌던 그림, 시화, 문집,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 학술문화 총서로서 기록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천만 자가 판각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에는 놀랍게도 탈자나 오자가 없다. 게다가 마치 한 사람이 써 내려간 듯 정교하고 유려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5만여 명의 사람들이 경전을 필사했고 연인원 125만 명의 각수들이 대장경을 판각했다.
한 나라의 기록유산은 단지 유형의 자산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선조가 우리에게 남긴 기록문화유산은 역사 앞에 당당하고자 했던 순전한 의식의 소산이며, 정신문화의 결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