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조선왕조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경복궁은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은 조선의 법궁입니다. 절제된 채색과 단정한 외관으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경복궁. 그 조성 원리와 각 전각들에 숨은 역사에 대해 알아봅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합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한양의 북악산 아래에 390여 칸 규모의 새 궁궐을 짓게 되지요.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큰 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남북의 직선 축에 따라 중심 건물들이 놓이고 좌우대칭을 맞춰 여러 전각들이 놓여있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배치된 경복궁은 마치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있는 군왕을 보는 듯합니다.
경복궁은 왕이 정무를 보는 정전과 일반적인 집무를 보는 편전, 그리고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침전으로 구분됩니다. 동쪽은 세자의 영역인 동궁이며 서쪽은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 영역이지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경복궁 창건의 주역은 정도전입니다. 그는 도읍지의 선정에서부터 궁궐의 배치, 각 전각의 이름 짓기 등 거의 모든 일에 관여했습니다. 경복이란 이름 역시 정도전이 지었지요.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경복궁을 실제 궁궐로 사용한 기간은 의외로 100년뿐입니다. 태조부터 세조 이전까지만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경복궁에 직접 기거하며 통치했던 왕은 문종과 단종뿐, 그리고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간 왕은 태종과 세종이었습니다. 특히 태종은 경복궁보다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자신의 손으로 형제를 죽인 경복궁에 머무는 것을 꺼려했다는 것입니다. 세조 역시 경복궁을 피했는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경복궁을 가장 사랑했던 임금은 세종대왕. 세종은 교태전과 동궁전을 창건한 것을 비롯하여 광화문과 강녕전을 개축하는 등 많은 전각들을 새로 짓거나 고쳤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인 한글이 탄생했으며 수많은 과학 기기들이 발명되었지요.
조선 후기에 경복궁을 자주 찾은 왕은 영조. 어머니 숙빈 최 씨의 사당을 참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은 크게 소실됩니다. 이후 무려 270여 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흥선대원군의 주도하에 대대적으로 중건됩니다.
경복궁 배치에는 사상적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태극 사상과 팔괘원리 그리고 제왕의 별자리인 자미원의 배치를 본땄지요. 무엇보다 경복궁은 성리학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이에 관해, 서울시립대 이강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 초기에 통치 철학을 제공하던 것이 유교 사상입니다. 마침 이 궁궐을 짓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정도전이라던지 권근 같은 사람들은 성균관 출신의 유학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경복궁에 있는 모든 건물의 이름에는 짐작컨대 유교적인 어떤 정치관, 즉 백성을 위한 정치를 베풀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정치관이 반영돼 있습니다.
또 하나는 동서남북에 있는 문 같은 것을 보시면 봄 여름을 뜻하는 건춘문, 연추문 이렇게 돼있고요, 또 사정전 옆에 있는 건물도 만춘전 천추전 그래서 동쪽은 봄을, 서쪽은 가을을 뜻한다는 그러니까, 당연히 여름은 남쪽이 될 거고 북쪽인 겨울이 될 텐데, 말하자면 이 동서남북이란 방위와 춘하추동이라고 하는 계절의 시간이 하나로 이렇게 융합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정전이 반듯하고 엄격한 조형미에 맞춰 배치된 것에 비해 주변 건물들은 좀 더 자유롭게 조영 돼 있습니다. 광화문을 통과해 경복궁에 들어서면 근정전으로 향하는 관문인 영제교를 만나게 되는데요. 이 영제교 주변에 서수 두 마리가 엎드려 물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혀를 빼문 모습이 무척 해학적이죠?
이에 관해 이강근 교수의 설명을 이어서 보시겠습니다.
“영제교는 보시면 좌우에 물길이 보입니다. 이 물길은 경복궁 저 뒤편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서쪽에 와서 이 지역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빠지는 그런 궁궐 내의 명당 수라고 하는, 그 물길을 설치하고 좌우 이 다리에 난간에 보시면 용이 4마리가 있습니다. 용은 제왕의 상징이죠. 그리고 특별히 물길, 저쪽에 보시면 양쪽으로 물길을 바라보고 입을 조금 벌리고 있는 그런 상이 있습니다. 저 상에 대해서는 유본예라고 하는 조선후기 학자가 19세기에 <한경지략>이라고 하는 서울 지리지를 낼 때, 저 상의 이름은 천록이다. 그런데 그 천록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근정전 앞마당으로 가볼까요. 이곳에서 왕들은 신하들과 함께 조하(새해나 명절 등 특별한 날에 왕에게 신하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올리는 의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조정 대신들이 모이는 귀한 자리치고 바닥이 무척이나 거칠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엔 눈
에 보이지 않는 세심한 배려가 숨어 있습니다. 햇빛이 강한 날에는 눈부심을 막고, 가죽신을 신은 대신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지요. 비가 오는 날에는 이 거친 돌바닥이 더욱 진가를 발휘합니다.
여기엔 기발한 건축 원리가 숨어 있지요. 전체적으로 비스듬하게 경사가 진 마당으로 비가 내리면 불규칙하게 놓인 박석을 따라 천천히 빗물이 흘러내립니다. 이 덕분에 궁궐이 침수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이곳을 둘러싼 월대에는 서른여섯 개의 다양한 동물 석상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을 비롯하여 십이지신상 등이 그것인데요. 그중에는 새끼를 품고 있는 서수도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대를 이어 왕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이때 새끼를 품고 있는 암놈의 시선은 근정문 쪽을 바라보고 있고, 그 뒤에 턱을 내놓고 있는 수놈은 근정전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이러한 동물상의 역할만큼 예술적인 구도와 형식도 중요하게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근정전 내부는 한눈에 보기에도 웅장합니다. 천장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이 위엄 있게 도사리고 있지요. 원래 중국 황제의 용만 발톱을 7개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임금을 황제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7개 발톱을 가진 황룡을 새겼습니다. 근정전 정면 옥좌 뒤에는 화려하면서도 품격 있는 일월오악도 병풍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병풍 한 귀퉁이에 경첩과 문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병풍에 여닫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데요.
이강근 교수는 이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 볼까요.
“조선 초기에는 건물의 동쪽으로 와서 이 건물 앞으로 나와서 정면 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의례를 해보니까 여러 가지 아마 불편한 점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지만 건물 뒤에다 문을 내고, 또 건물 뒤에 문이 지금도 있습니다만, 문을 열면 바로 그 어좌의 뒷계단이 있습니다. 앞에서 보면 뒷계단이 보이지 않는데 뒤에도 계단이 있다는 것은 그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는 거죠. 근데 뒷계단을 올라오면 병풍에 다 가로막혀 있어요. 그러니까 병풍이 가로막혀 있는 한 계단으로 올라가 봐야 어좌에 이르지 못하니까 병풍에 문을 낸 거죠. 병풍을 뚫어서 임금님이 병풍 안에서 임금 자리인 용상으로 나오는, 그런 식의 행차 동선을 만들었는데 굉장히 극적인 효과가 있었을 거 같습니다.”
아직까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표현을 본 적은 없지만 상상해 보면 정말 높은 곳에서 ‘짠’하고 나타나서 권위와 신비감을 연출했을 것 같습니다.
정전인 근정전 뒤에 자리한 사정전. 사정은 생각하고 정치를 하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하거나 정무를 보는 일종의 집무실이지요.
사정전 뒤편에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이 있습니다. 강녕은 평안하고 건강하라는 뜻. 강녕전은 임금이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등 일상생활을 하던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경복궁의 전각 중 가장 화려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경회루. 이곳은 나라의 공식적인 연회 장소로, 주로 궁중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들의 접대가 이뤄졌습니다.
경회루는 노비 출신의 건축가 박자청이 8개월 만에 완공한 것으로, 조선시대 3대 목조건물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돌기둥 위에 올라앉은 누마루, 그 위에 장엄한 팔작지붕의 위용을 갖춘 경회루. 연못에 드리운 경회루의 그림자는 아침보다 밤에 더욱 그 화려한 자태를 뽐냅니다. 기회가 된다면 밤에 경복궁에 가서 경회루를 보시기 바랍니다.
경회루를 가장 많이 이용했던 임금은 세종대왕. 그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무과시험을 주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단종은 이곳 경회루에서 숙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겼지요. 세조에게는 활쏘기를 즐기던 공간이었으며, 연산군에게는 기생들을 불러 놀던 향락의 공간이었습니다.
한편 경회루 연못은 기가 막힌 과학적인 배수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마치 고인 물처럼 보이지만 연못 밑으로는 물이 잘 빠져나가는 기법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강근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이 경복궁의 뒤편에서, 뒤에 산이 있으니까 저 산 위에서 샘이 솟거나 비가 오고 나면 물이 저 북쪽에서 흘러나올 텐데, 물길을 쭉 만들면서 뒤편에는 향원지라고 하는 못을 만들어서 거긴 정자를 짓고, 이 남쪽으로는 경회루라고 하는 누각을 만들고 주변에 못을 만들어서 배수 체계 상태에서 저수를 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게 홍수조절 기능도 있겠죠? 그다음에 또 하나는, 이 물을 혹시 불행하게도 궁궐에 불이 났을 때, 소방수로 쓸 수 있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다목적 시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원 중 최고의 절경을 보여주는 향원정. 이곳에도 놀라운 배수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향원정 한 귀퉁이에는 열상진원이라는 아주 독특한 구조물이 있는데요. 이곳에서 물은 위에서 아래로 바로 흐르지 않습니다. 북쪽 입수구로 들어와 남쪽으로 흘러, 열상진원으로 들어오면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오리처럼 꺾여 흐릅니다. 이 물줄기가 배수로를 통해 경회루 연못으로 흘러가지요. 왜 이렇게 설계했을까요?
밖에서 물이 연못으로 들어올 때 물속에 포함되어 있는 오물이나 찌꺼기 같은 것을 걸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물길을 그대로 직선으로 유입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여러 번 꺾어서 오물은 가라앉히고 정화된 물이 연못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재미있는 시설입니다.
강녕전 뒤편에는 왕비를 위한 전각이 있습니다. 바로 교태전입니다. 교태란, 양의 성질을 가진 왕과 음의 기운을 가진 왕비가 잘 교합해서 왕자가 태어나길 바란다는 뜻이지요. 이 아름다운 전각에서 왕비들은 오로지 왕자를 낳기만을 빌고 또 빌었습니다. 교태전은 화려한 외형과 달리,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 생산을 둘러싸고 온갖 궁중 암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한편 교태전 출입문 양쪽에는 네모반듯한 기둥이 있는데요. 사실 이것은 기둥이 아니라 강녕전의 굴뚝입니다. 이 굴뚝에 대해 이강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속에 저 건물에서부터 굴뚝까지 사이의 땅속에 연기 또는 열기가 빠져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잘 연기가 바깥으로 배출되느냐에 따라서 난방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아마도 이렇게 길게 굴뚝을 빼고 높여놓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거 같고요. 다만 이제 이것이 궁궐 내 내전이 계속 중첩돼 있기 때문에 이걸 따로 독립해서 세우기보다는 뒤에 있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이런 부속 건물에 붙여서 굴뚝을 만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꾸미는 효과도 있고요. 보시는 것처럼 만수무강이라고 하는 글을 새겨서 또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교태전 뒤뜰에는 소박하지만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후원이 있는데요. 바로 아미산입니다. 네 개의 꽃계단 위엔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굴뚝들이 있습니다. 이 굴뚝들은 아미산에 피어난 풀꽃들과 함께 교태전을 더욱 우아하고 품격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지요. 궁궐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왕비들은 이 아름다운 꽃동산을 보며 시름을 달랬겠지요?
교태전이 중전을 위한 공간이라면, 자경전은 왕의 어머니인 대비와 할머니인 대왕대비를 위한 공간입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이, 조선왕조 역사에서 대비는 주로 수렴청정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요. 대개 임금인 아들이나 손자가 너무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 대비들은 그 뒤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자경전은 전각보다 담장이 더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각종 화려한 꽃들이 새겨져 있고 굴뚝에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십장생을 아름답게 새겨 놓았는데요. 특이하게도 여기 새겨진 동물들 중에는 불가사리처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닷속 생물 불가사리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불을 먹으면 점점 강해져서 누구도 해칠 수 없다는 뜻의 ‘불가살(不可殺)’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막강한 존재로서 전각을 지키거나 이곳에 침입하는 나쁜 기운을 물리쳐주는 존재로 인색해서 새긴 것으로 여겨집니다.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는 궁 안의 또 다른 궁, 건청궁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구한말 대한제국의 비극적인 핏빛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이 고종에게 전구를 소개했습니다. 고종은 에디슨 전기회사에 공사를 맡겨 건청궁에 전기 시설을 설치한 것이지요. 이때 향원정의 물을 끌어다 발전기를 돌렸다고 합니다. 원래 향원정 연못가는 밤이면 어두워서 연못에 빠질 위험이 있어서 각등이라는 등을 설치해서 불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전기 시설을 설치하면서 연못 주변에 가로등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전 설비를 갖추고 전기를 사용한 것입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집념으로 270년 만에 다시 세워졌던 경복궁.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안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들이 무참하게 헐려나갔습니다. 치욕의 역사지요. 이후 2010년에야 비로소 경복궁은 제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화려하게 창건되었다 오랜 세월 폐허로 방치되었고, 다시 복원되고 소실되기를 반복한 경복궁. 그 영욕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은 이 아름다운 조선의 법궁은 우리나라 아픈 역사의 산 증거로 묵묵히 서있습니다. 요
즘은 외국 관광객들의 필수 투어 코스가 되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