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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하늘의 뜻을 묻다

조선의 과학 3

by 윤슬

하늘은 시시때때로 그 표정을 바꿉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변덕스러운 하늘의 뜻을 묻기 위해 다양한 천문의기들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농업기술 분야에서도 독창적인 발명품들을 개발했습니다.

논바닥이 갈라지면 농부의 마음은 타들어 가지요. 하늘의 일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법. 하지만 전통 농경사회에서 임금은 가뭄이 들어도, 홍수가 나도 이를 자신에게 덕이 없는 탓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강우량을 재고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일은 임금에게는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지요.


수표교

하천의 수위를 측정했던 수표교는 옛날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들 중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다리입니다. 그런데 원래 청계천에 있었던 수표교가 왜 지금은 장충단공원에 세워져 있는 것일까요?

오랜 옛날부터 수표와 함께 청계천에 있었던 수표교를, 청계천을 복개할 때 교각만 장충단공원에 옮겨놓은 것입니다. 원래 석조 수표교가 있던 자리에는 임시로 나무 수표교를 세워놓았습니다. 장충단공원의 수표교를 다시 이곳 청계천으로 옮겨와 복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단 결과, 교각의 노후가 너무 심해 옮기는 과정에서 훼손될 수 있다고 하여 아직까지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표

수표교와 한 짝을 이루는 수표 역시 원래의 자리가 아닌,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있습니다.


약 3미터 높이의 화강석 수표에 새겨진 눈금으로 당시 청계천의 수위를 읽었습니다. 물의 압력을 받는 상류 쪽 부분은 날렵하게 만들어 물의 저항을 잘 견디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하류 쪽 눈금 부분에는 동그라미를 새겨 놓았는데, 비가 많이 왔을 때 수위를 알리는 표시입니다.

이 수표에는 구멍이 세 개 뚫려있는데, 3척이라고 표시된 부분은 갈수기를 뜻합니다. 6척이나 7척이면 평수 즉 평상시의 수위로 평소 청계천에서 수영도 하고 빨래도 했다고 합니다. 9척이나 10척인 경우에는 수위가 매우 높아졌으니 대피하라는, 일종의 수해 경보기 역할을 했지요.



수표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놀라운 과학 기기가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바로 그것, 측우기입니다. 이 기기는 너무 단순하게 생겨서 과연 강우량을 잴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측우기에는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세종 23년 8월, 호조에서 과학적인 우량계를 만들자고 간언합니다. 사실 그보다 넉 달 앞서, 측우기의 아이디어를 맨 처음 낸 사람이 있습니다. 역시 장영실 아니냐고요? 땡! 틀렸습니다. 측우기 아이디를 낸 사람은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측우기를 발명한 해가 1441년이니, 1639년 로마에서 가스텔리가 처음으로 강우량을 측정한 해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세계 최초의 강우량계를 개발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상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지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국보)

그렇다면 과연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측우기로 어떻게 빗물의 양을 쟀을까요?

비가 오면 원통형의 철제 그릇에 빗물이 담기겠지요. 이때 주척이라는 자를 이용해 비의 양을 쟀는데, 단위는 척, 촌, 푼으로 분류했으며, 최소 단위는 2mm입니다. 측우기의 지름은 약 14cm.


여기엔 놀라운 과학적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입구가 14cm보다 넓으면 비의 양이 적을 때 측정오차가 커지고, 반대로 입구가 좁으면 바람이 불 때 빗물을 받기 힘듭니다. 14cm는 당시 수많은 실험 끝에 얻은 과학적 수치인 것이지요. 놀랍게도, 측우기의 지름 14cm는 현대의 세계 기상 기구에서 정해 놓은 강우량계의 표본오차범위 1% 이내의 규격에 해당합니다.


이 부분에 관해 전종갑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WMO라는 세계 기상 기구에서 정했는데, 강우량계는 수수구가 직경으로 13cm~20cm 가장 좋다 그렇게 만들라는 것이죠. 그걸 보면, 우리 선조가 어떻게 이걸 알았는지 신기합니다. 좀 더 크게 할 수도 있고 작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너무 과학적으로 잘 만들었다고 감탄할 정도예요.”


측우기의 모양이 원통형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원통일 경우에는 360도 어느 방향에서 빗물이 들어오더라도 일정한 양이 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더욱 신기한 것은, 오늘날 기상청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유량계가 세종대에 만들어진 측우기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차이라면, 비가 내릴 때 수수구를 통해 물이 고이고 그 물통이 쓰러지는데, 이때 그 횟수를 전자식 카운터로 재서 우량 값을 자동으로 환산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1442년, 측우 제도가 본격화되면서 전국적으로 측우기 300여 대가 설치되어, 빗물 양의 관측망이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뿐만 아니라, 측우기를 이용해 강우량을 꼬박꼬박 기록까지 했지요.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비가 오기 시작한 시간과 그친 시간, 비의 강도 등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과연 기록의 나라, 조선답지 않습니까.

승정원일기 중 날씨에 관한 기록

전종갑 교수의 설명을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1770년대부터 1908년까지 기록이 있고, 현대까지 계속 서울 관측 기록은 연속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측우기를 이용한 강우량을 기록한 역사가 230년이 넘는 거예요. 그런 장기적인 기록이 하루도 빠짐없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인 학회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외국 학자들이 너무 놀라는 겁니다. 그렇게 고귀한 자료가 있었구나, 하고 말이지요. 이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장기 기록이거든요.”


조선왕조가 240년에 걸쳐 남긴 강우량 기록. 이는, 현대는 물론 미래의 기상을 예측하고 패턴화 할 수 있는 과학적 데이터이자 소중한 문화자산입니다.


조선의 또 다른 혁신적인 농업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시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겨울에 핀 꽃은 인위적인 것이니 올리지 말라.” 성종실록 14년 11월 14일 자에 실린 기록입니다. 겨울에 꽃이 피었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중종 4년 1월 11일에도 임금에게 봄꽃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비닐하우스가 없었던 조선시대 겨울에 봄꽃을 임금에게 올렸다니 말이지요.


그 의문은 15세기 생활과학서인 <산가요록>이란 책에서 풀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온실을 지었고 그 안에서 채소를 길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흔히 온실의 시초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온실로 알려져 있는데요.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이보다 170년이나 앞선 조선 초기에 온실을 지어 이용했습니다.


산가요록-horz.jpg 산가요록에 기록된 조선시대 온실(사진 출처: 나무위키)


기록에 따르면, 남쪽을 제외한 삼면에 진흙과 볏짚을 섞은 흙벽돌을 쌓아 올렸고, 바닥은 구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위에 30센티미터 정도의 배양토를 깔았으며 45도로 경사진 남쪽면의 창살에는 기름먹인 한지를 붙여 막았습니다. 특히 이 온실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흙의 온도를 25℃로 유지할 수 있었지요. 이때 아궁이에 가마솥을 얹고 물을 끓였는데 수증기가 관을 통해 온실 안으로 흐르게 했습니다. 이로써 실내 온도는 물론 습도를 높일 수도 있었지요.


유럽보다 170년이나 앞서 이처럼 뛰어난 온실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지’의 역할이 컸습니다. 판유리가 없던 시절, 조선의 기술자들은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 채광창으로 이용했습니다. 기름 먹은 한지는 팽팽하게 얇아지면서 반투명해지고 햇빛이 투과되지요. 따라서 광합성 효과가 훨씬 더 잘 이뤄집니다.

대개 온실에 쓰이는 비닐에 이슬이 맺히면 그 이슬이 식물의 어린잎에 떨어졌을 때 성장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에 반해, 한지는 숨을 쉬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물방울이 맺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온실 내 환경을 훨씬 쾌적하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온돌과 수증기, 자연 채광의 조화로 한겨울에 채소와 꽃들을 가꿀 수 있었고 임금에게 진상까지 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대의 비닐하우스 온실보다 조선시대의 한지 온실이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대에는 경제성이 떨어져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조선은 오로지 관념적인 유학을 신봉하기만 했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천체의 운행을 살피기 위해,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그리고 과학적인 농사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며 놀랍도록 획기적인 기기들을 발명했습니다. 이 기기들에서 우리는, 하늘을 경외하고 대지를 존중하며 인간을 보살폈던 우리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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