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학 2
조선의 또 다른 놀랍도록 창의적인 복합 시계를 만나러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가볼까요. 2층으로 올라가면, 마치 장롱 같은 유물이 보입니다. 바로, 혼천시계인데요.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이면서 동시에 천체의 운행을 보여주는 초정밀 천문시계입니다. 현종 10년, 1669년에 과학자 송이영이 전통 혼천의와 서양식 자명종을 연결해 만든 장치입니다.
혼천시계는,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이 움직이는 구조와 원리를 한눈에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장치가 시계 장치와 연결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무상자 안의 기계 장치들이 어떻게 하늘의 운행을 재현할 수 있을까요. 비밀은 시계 장치와 연결되어 움직이는 여러 개의 고리가 복잡하게 얽힌 혼천의 장치에 있습니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을 재현하는 모형입니다. 12궁, 24 절기가 새겨져 있고, 360으로 분할된 황도고리 등이 있는데요. 혼천의 한가운데에 있는 동그란 구조물은 지구의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이 당시 조선 사회에 일반적인 상식으로 퍼져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의는 시계 장치와 연결돼 하루 한 바퀴씩 돌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구의 표면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주요 대륙과 대서양 등의 바다, 경위선 등이 표시되어 있고, 1648년 네덜란드 지도에서 처음 등장해서
1950~60년대에야 일반화됐던 ‘가본달리아라는 호주 대륙 북동 해안의 지명까지 나타나 있는 등 당대 최신 정보를 반영한 지도입니다.
나무상자 안에는 해와 달과 별의 운행과 궤도를 표시하는 고리가 있는데요. 이 고리들이 톱니바퀴와 연결되어 하루에 한 바퀴 회전운동을 합니다. 즉 천체들의 일주운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작은 상자 안에 우주 운행의 이치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하늘의 형상을 보여주는 기능을 갖춘 시계는 세계 시계 기술사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입니다.
영국의 과학사학자로 동양 과학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조지프 니덤(1990~1995)은 혼천시계를 보고 감동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기기를 완벽하게 복원해 전 세계 모든 과학기술 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라고.
혼천시계는 세계의 박물관에 전시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독창적인 과학 발명품입니다.
한편 세종 영릉 앞마당은 조선시대 천문과학 기기들의 종합 전시장입니다.
그중 천문 관측 기구의 기본이 되는 혼천의는 별자리의 각도를 측정하는 기계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일찍부터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혼천의를 천체 관측을 위한 기본적인 기기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혼천의를 처음 만든 것은 세종 15년. 이후 조선시대 천문역법의 표준시계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됩니다.
간의는 세종 14년에 혼천의의 구조를 간소화하여 관측하기 편하도록 개조한 관측기기입니다. 간의를 이용해 태양의 고도를 관측하고 그날의 일출과 일몰 시간을 계산했으며, 밤에는 다섯 개의 행성과 별을 관측할 수 있었지요. 특히 간의의 적도좌표 시스템은 회천 축이 적도를 향하고 있어서, 별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가며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관측의 정확도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도, 분, 초 중에서 도에 해당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소간의는 간의에서 적도의 장치를 따로 떼어내 관측에 편리하도록 간편하게 만든 것입니다. 소간의 또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천문 관측기기로, 세종 16년, 경복궁 천추전과 서운관에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소간의를 올려놓고 천체를 관측했던 시설인 소간의대는 현재 계동에 있는 한 대기업 사옥 앞마당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소간의대는 여러 번의 전란으로 무너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복원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시대,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과학적 성취를 이루었던 때는 누가 뭐래도 세종대왕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을 거치며 세종대에 이루었던 과학기술의 성과는 제대로 계승 발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7세기 조선 후기에 다시 한번 과학 발전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요. 서양 과학 문물이 들어오고 실학사상이 꽃을 피운 가운데, 우리만의 독특한 과학사상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처럼 조선 전기에 그 화려한 꽃을 피웠던 천문과학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임진왜란 등 숱한 전란을 거치면서 천문기구들이 소실되거나, 있던 것도 방치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17세기 조선 후기에 도입된 실학사상과 함께 다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때 몇몇 실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전해준 천문 과학기구들을 접하게 되는데요. 이들을 통해 조선 사회에 서양 천문학이 도입됩니다. 이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천문학을 우리 고유의 관점을 통해 이해하고 해석하게 됩니다. 예컨대, 김석문은 태극의 원리로 지동설을 주장하고, 최한기는 기륜설이라는 독특한 이론체계로 뉴턴의 만유인력과 천문학을 해석했습니다.
그중 가장 뛰어난 과학 사상가인 담헌 홍대용의 과학사상과 발명 기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홍대용은 당시 지구가 네모난 형태라고 믿던 조선 사회에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이론을 비롯하여 지전설, 무한우주설 등 파격적이고 독특한 학설들을 제시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 무한론‘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우주관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대담한 이론이었지요.
특히 그는 이러한 자연과학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을 비롯한 모든 국가가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설파했습니다. 이는 마침내 주체성을 강조하는 역사관으로 이어지면서 박지원, 박제가 등의 북학 사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홍대용의 사상과 세계관은 독자성, 개체성으로 이뤄져 있는데, 모든 문명,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각자의 습성과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가 계승되고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도 각자의 존재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계급과 신분 질서가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고 하지만 엄연히 신분제도가 살아있었던 당시 조선 후기 사회에서 매우 선진적이고 파격적인 사상의 설파였습니다.
홍대용은 자신의 과학사상을 말로만 설파한 것이 아니라 직접 혼천의와 자명종도 발명했습니다. 홍대용의 혼천의가 특별한 것은, 물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기존의 방법에서 벗어나 기계 혼천의로 개량했다는 사실입니다. 서양의 자명종을 도입해 시계와 이어진 톱니로 움직이게 만든 것이지요.
홍대용의 혼천시계는 천체의 운행을 통해 날짜와 시각을 알려주는 혼천의에 추의 힘으로 작동하는 자명종을 연결하여 하나의 기계 장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혼천의 안에 태양을 상징하는 태양 모형이 일 년의 절기와 하루의 시각을 알려 주고, 달을 상징하는 달 모형이 음력 날짜를 알려줍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천문학에 대해 관념적으로 접근한 것에 반해, 홍대용은 백성들의 농업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관점으로 이해했습니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따라서 지구가 어떻게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지, 그래서 어떻게 시간과 절기가 바뀌는지, 그에 따라 어떤 단계의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알아낸 것입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천문의기들을 중심으로 그 시대의 천문학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선의 과학적 농사 기기들을 중심으로 농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