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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는 정말 전국 일주를 세 번이나 했을까?

by 윤슬

장엄하게 솟은 푸른 산과, 결 고운 비단처럼 흐르는 강물. 그 산 아래 다정하게 모여 앉은 마을. 마을 사이로 생겨난 길과 그 길을 가는 사람들. 이 땅, 이 산하를 온전히 그려내고 싶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역사를 말하고 싶은 이였지요. 고산자 김정호. 평생 평면의 지도를 통해 입체의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 그의 학자로서의 정신과 장인으로서의 솜씨에 대해 알아봅니다.


집념의 지리학자, 김정호


오늘날 고산자 김정호, 하면 모두들 대동여지도를 떠올립니다. 그만큼 그 시대에 보기 드문 매우 뛰어난 지도니까요. 하지만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만 그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것처럼 전국을 세 번이나 답사하며 지도를 그린 것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알려졌을까요? 우린 그동안 김정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산자 김정호의 작품 세계와 그 정신에 대해 알아보고 그가 왜 위대한 지리학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고산자 김정호.

그는 이용에 편리한 지도책과 지리지를 편찬하기 위해 수많은 아이디어를 창안하여 지도 속에 담아낸 장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지도를 통해 가장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한 지리학자이기도 했지요. 무엇보다 평생 오직 지도 제작의 외길만을 걸어온 출판인이기도 했습니다.

김정호의 지도와 지리지는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위대했습니다.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매우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반영되었기 때문이지요.


김정호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한 국립중앙도서관 이기봉 학예연구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김정호 하면 대표적으로 대동여지도를 얘기하는데 제가 보는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의 여러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의 삶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의 삶의 일정 시기의 모습만을 담고 있고 김정호는 20대 안팎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지도의 걸작,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

한라에서 백두까지 6.8미터. 폭 3.8미터짜리 22개의 책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지도, 대동여지도. 선의 흐름만으로 우리 국토를 아름답게 표현한 지도의 걸작입니다. 또한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외에도 청구도, 동여편고 등 수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마지막 열정을 쏟아부어 만든 걸작이며 조선의 마지막 지도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는 어떻게 이토록 정교하고 복잡한 지도들을 만든 것일까요?


“그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전국을 세 번이나 돌고 여덟 번 백두산에 오른 뒤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그러나 지도가 너무나 상세하여 국가기밀 유출을 우려한 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힌 후 사망했고 대동여지도는 모두 압수되었다.”


이것이 그동안 일반에 널리 알려진 김정호의 일대기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요?





지난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지하창고에서 대동여지도 목판 11개가 발견되었습니다. 분명 대원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고 알려졌던 그 대동여지도 목판인데요. 어떻게 그 목판본이 남아 있는 것일까요? 정말 그는 옥에 갇혀 죽은 것일까요? 그는 정말로 전국을 직접 답사하며 지도를 만들었을까요?

대동여지도 목판본 발견으로 인해, 그동안 정설로 알려졌던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 수정되었습니다.

김정호는 기존에 제작된 수많은 지도와 지리지들을 꼼꼼하게 비교 검토하여 획기적인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한 것입니다. 그 증거는, 김정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학자들이 남겨놓은 기록 속에 있습니다.


김정호에 관한 오해


그렇다면 오늘날 왜 이런 잘못된 내용이 널리 알려졌을까요.

일제강점기 당시 어느 신문에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로 쓴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이걸 이어받아 마치 소설처럼 김정호의 일대기를 쓴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왜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이노 다다타카라는 일본인이 1800년대 전반기에 측량을 해서 매우 큰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대동여지도보다 더 자세한 지도를 측량해서 만들었는데, 실제로 그런 지도는 쓸모가 없었지요. 이때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이노 다다타카라는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나라에서 지도에 그 정도 얘기한 사람이 있나 찾아본 것입니다. 그때 제일 유명했던 사람이 김정호였지요.


사실 개인이 전국을 세 번이나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게다가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이미 뛰어난 지도와 지리지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조선에서는 각 고을 백성들을 동원하여 실제로 측량하고 중앙정부에 올려 지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고을 단위까지 기본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전국 지리지를 편찬할 수 있었지요.


이에 관해 이기봉 학예연구관의 말을 계속 들어보겠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도 지도가 있어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있고요. 삼국유사에도 보면 백제시대에도 지리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의 경우는 당나라에 봉역도라는 지도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 조선시대에도 세계지도와 한반도 전체를 그린 전국 지도와 팔도를 그린 도별도, 각 군현을 그린 군현지도, 군사 목적으로 그린 관방지도, 목장지도 등 다양한 지도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지도가 형편없어서 왜군이 조선의 지도를 빼내가는 대신 염탐꾼이 와서 지리를 파악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지구의 크기를 재려면 지구만 한 자가 있어야겠죠. 한반도의 키를 재려면 한반도만 한 자가 있어야겠죠. 그 자의 역할을 사실은 하늘에 있는 별이 해주는 거예요. 별을 통해서 위도와 경도를 알아냅니다. 그러니까 걸어 다니면서 지도를 만든다는 건 좁은 지역은 가능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반도 같은 전체 지도를 만들려면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하거든요. 위치나 거리를 파악하려면 별이 보는 관점에서 지도를 만들면 정확하게 나옵니다.”

조선 전기 조선왕조의 모든 힘을 기울여 편찬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세계 최고의 지리지이며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최대의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김정호는 이 동국여지승람과 문헌비고, 해동여지도, 동국지도 등을 토대로 자신의 서재에서 평생 각종 지리정보를 간추려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직접 답사도 하지 않고 지도를 만들었으니 김정호는 그저 평범한 지도 제작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히 뛰어난 지도 학자였고 장인이었으니까요.


대동여지도보다 뛰어난 지도, 청구도


청구도

사실 김정호 이전에도 조선에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지도들은 대부분 너무 커서 이용하는 데 많은 불편이 따랐습니다.

김정호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안해 냈지요. 바로 대형 지도를 잘라 책으로 만들었는데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청구도’입니다.


사실 김정호, 하면 대동여지도를 떠올리지만 청구도는 어떤 면에서 대동여지도보다 더 뛰어난 지도였습니다. 1834년에 제작한 첫 번째 판 청구도는 김정호가 지리학자로서의 끈질긴 연구 결과 파악된 기존 지도의 단점을 개선하고 장점을 살린 결과물이었습니다.


GPS가 일상화되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했던 지도는 ‘10만 분의 1’ 도로 지도입니다. 예전에 자기 차로 여행을 다녔던 사람들은 차에 이 지도를 항상 갖고 다니며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구도의 형식이 이와 똑같습니다. 일례로, 찾아보기가 그것이지요.


다시 이기봉 학예연구관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청구도의 가장 뛰어난 점은 찾아보기가 있다는 거예요. 이 찾아보기 지도책은 우리나라 지도책 중에 청구도 밖에 없습니다. 현재까지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전통 시대 지도책 중에는 일본과 중국에도 없어요. 이건 순수하게 김정호의 창안이죠.

두 번째로 뛰어난 점은 축척을 면마다 다 표시해 놨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 지도에도 축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들은 지도 위에다 선을 그어서 축척을 했어요. 김정호가 그 지도를 보고 선이 있으면 내용과 헷갈릴 때가 있다고 해서 선을 없애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없애면 문제가 생겨요. 축척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김정호가 외곽에다 축척을 합니다. 이게 10리입니다. 간격이 여기서 등을 외곽으로 다 뺀 겁니다.”


1834년, 김정호는 청구도 첫 책을 펴냈습니다. 이후 앞선 판본의 단점을 끊임없이 개선하여 1840년대 말까지 3차에 걸쳐 네 종류의 청구도를 연속으로 간행했지요. 특히 세 번째 청구도부터는 지도의 제작을 비롯하여 이용, 교정, 필사, 지리지의 편찬 방법 등 근대지도의 모든 것을 담아낸 청구도범례를 수록합니다. 이를 통해, 학자이자 출판인이었던 김정호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이기봉 학예연구관의 말을 계속해서 들어보겠습니다.

"이 청구도는 현대에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지도책의 모든 걸 다 구현했어요. 그다음에 친절하게 고치는 방법까지 다 써놨습니다. 현대 지도책을 1800년대 중반에 완성을 시킨 사람이에요. 그 시대는 전통 시대예요 현대도 아니고, 그런 지도 제작자는 감히 상상하건대 없을 것 같습니다. 거의 유일무이했던 사람인 거 같습니다. “


대동여지도: 전국의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를 아래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하지만 청구도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책으로 나눠진 형태여서 동서남북으로 자유로운 이어 보기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구도의 단점을 보완해 다시 제작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대동여지도이지요. 대동여지도는 긴 동서로 쫙 펼 수 있게 해서 동서로 다 연결할 수 있습니다. 청구도는 이게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대동여지도는 상하를 연결하면 도별지도가 되고 모두 연결하면 전국도가 됩니다. 분리와 합체가 자유롭고 접으면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이용하는 데 매우 편리하지요.

또한 복잡한 청구도와 달리, 내용을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즉 다양한 기호들로 산성이나 능, 역, 등을 표시하여 효과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도로 부분에 10리마다 방점을 찍어 어떤 구간이라도 실제의 거리를 쉽게 가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때문에 전국 어느 지점이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일정을 예상할 수 있지요.


목판 대동여지도

여타의 필사본 지도들과 달리, 대동여지도는 목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때문에 필사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오류를 방지할 수 있으며, 대량 생산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표현하여 각각 구분할 수 있도록 한 점도 흥미로운데요. 이때 단일곡선은 배가 다닐 수 없는 물길이며 이중곡선은 배가 다닐 수 있는 물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김정호는 국가에서 지도 제작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지도는 현대에도 국가의 주도로 만듭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요. 해당 관청에서 관리가 만들었지요. 하지만 김정호는 개인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처럼 평생 고민을 거듭해 가며 지도를 제작했을까요? 사실 김정호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저 그는 지도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았던 것이라고요.

김정호가 혼신의 힘을 모아 만들어낸 대동여지도.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이 대동여지도를 보고 단박에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모두 한자로 쓰여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현대인들을 위해 한글로 해석한 대동여지도를 만들어낸 이가 있습니다. 반평생 지도를 연구하고 만들어온 최선웅 씨는 10년을 꼬박 매달려 대동여지도를 연구한 결과, 2년에 걸쳐 지명 17,000개를 모두 해석하여 개인적으로 한글판 대동여지도를 펴냈습니다. 현재 시중에 <해설 대동여지도>라는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전통지도 중 근대 지도의 특징이란 점에서 봤을 때 김정호의 지도는 한•중•일 나아가 세계를 통틀어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특히 근대 지도의 모든 점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위대하지요. 그는 지도 사용자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이용하기 편리한 새로운 버전의 지도를 지속적으로 남겼습니다. 그런 사람은 조선의 지리학자 중 김정호뿐입니다.


오랜 세월 굽이쳐 흘러온 이 땅의 이야기. 그 땅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사람을 위한 지도를 만들었던 고산자 김정호. 인간에 대한 배려와 창의성, 그리고 그 끈기와 집념이야말로 김정호를 최고의 지도지리학자로 만들었습니다.

김정호가 위대한 것은, 그가 만든 지도가 정확하고 이용하기에 편리하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청구도 범례에도 썼듯이 그는 자신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학자들이 갖춰야 할 미덕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런 점에서 김정호는 참으로 위대한 창작자이며 학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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